만들어진 서양
니샤 맥 스위니 지음, 이재훈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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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서양>의 전반부는 서양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밝히는데 주력한다. 우선 서구 문명의 모태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로마를 뜯어보자. 그리스-로마는 이를 지칭하는 단일한 단어가 없다는 것부터 이 두 문명이 얼마나 다른지를 반증한다. 그리스와 로마를 하나로 묶다니? 고대 로마인들은 어리둥절할 게 분명하다. 그리스어를 주로 사용했던 동로마조차 스스로를 로마이오이(로마인)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심지어 로마인은 스스로의 뿌리를 트로이라 여겼는데 그게 어떤 나라인가! 그리스 연합의 최대 라이벌이자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으로 완전히 망한 나라 아니던가!


그리스는 어떨까? 아테네인 이라면 자신이 스파르타, 마케도니아, 코린토스, 테베 등과 한데 묶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 세상에,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한 팀으로 묶다니, 그들이 원수보다 못한 사이였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던가? 갈등의 원인도 특별한 게 아니었다. 성격 차이라는 이혼사유보다 흔해 빠진 이유. 그것은 바로 '문화적 차이'였다.


사실 그리스라는 이름은 로마인들이 만든 것이다. 그쪽 지방의 국가들을 쉽게 관리하기 위해 붙인 라틴어. 이 신조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식민 지배자인 로마인뿐일 것이다. 일제가 만주와 조선을 지배한 뒤 두 지역을 한데 묶어 조만이라고 불렀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스라는 이름도 이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말이다. 물론 로마는 이 문제로 크게 벌을 받았다. 근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그리스와 로마를 한데 묶어 그리스-로마라 불렀기 때문이다. 말하고 있는 나조차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책의 후반부는 이 개념이 어떻게 변하고 이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개념을 다루는 자들은 대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 개념이 서로 상반되는 목적을 이루는데 활용됐다는 점이다. 유럽의 열강들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류 문명의 모태를 그리스-로마로 정했고 자기들이 그 정당한 후계자임을 강조했다. 미국은 그 식민 통치자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러니까 제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동일한 개념을 이용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진정한 후계자가 쇠락하는 유럽이 아닌 미국에 있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이 책은 참 재밌다. 역사를 그렇게 많이 읽었음에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 줄줄이 나온다는 점이 그렇다. 리빌라, 알킨디, 비테르보의 고프레도, 라스카리스, 툴리아 다라고나, 앙골라의 은징가, 윌리엄 글래드스턴, 에드워드 사이드, 캐리 람. 헤로도토스나 프랜시스 베이컨이 나오면 식상해서 죽을 맛이 날 정도다. 재미의 다른 한 축은 그토록 정치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역사가 꼼짝없이 그 안에 갇혀 유린당하는 현장에서 찾을 수 있다. 내 생각에 이 지구에서 가장 정치적인 건 역사다. 역사는 결코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사실만 기술하면 될 일이, 왜 이렇게 힘든 건가? 이 질문은 전제가 틀렸다. 사실이라는 것, 그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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