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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돼지 ㅣ 아작 YA 2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황희선 옮김 / 아작 / 2023년 9월
평점 :
"캐롤 페이지는 사랑받지 못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p.9)
괴상하게 짓눌린 돼지코가 문제였다. 의대생이 분만 중 코를 눌러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단순히 코가 들린 수준이 아니었다. 코털과 점막이 모두 보일 정도였으니까. 캐롤 페이지를 자라는 내내 '코범벅'이라 불렸다. 엄마는 출산 중 사망했다.
캐롤 페이지가 금수저였다면 성형수술을 고려했을 것이다. 과학 문명이 초고도로 발달해 우주를 원하는 만큼 여행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도 부의 불평등은 여전했고 캐롤은 가진 게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캐롤의 별에 출장온 운영자에게 '배정된' 여자였다.
그 운영자가 캐롤에게 해준 것을 보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기 캐롤은 국정 거주 구역에 체류권을 얻었고 기본적인 의료지원을 받았으며 고아 학교에 배정됐다. 캐롤의 강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명석, 부지런, 집요.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불릴만한 성장 환경이었지만 캐롤은 모든 일에서 상위 1%에 속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녀가 가진 능력 중 전문가라고 부를만한 영역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산술, 미적분, 벡터 수학, 금속학, 전자 공학, 컴퓨터 공학, 금속세정, 영양학, 천문학, 우주조리학, 간호학, 지압법, 27가지 기초 성애술, 각종 장치들의 수리법, 우주의학, 엔진 공학, 궤도 비행.
캐롤은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결국 일반 승무원 훈련 과정에 입교할 수 있었다. 양자적 도약이라 부를만한 성과였다.
그렇다고 코범벅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는 없었다. 인간 세상에선 여전히 외모가 중요했다. 물론 출신 성분의 문제도 있었지만, 캐롤은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 같이 비행하는 승무원들이 가진 능력 모두를 가뿐히 압도했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동료들은 캐롤을 무시하고 그녀의 인권을 유린하고, 정서적, 육체적 폭력을 가했다. 그 많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캐롤은 여전히 그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고 우주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해다 바쳤다. 이 겁 많고 순종적인 동물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냉정한 돼지>는 200p도 안 되는 책이다. 캐롤의 짧은 성장사와 음모의 발현까지 빠르게 달린 뒤 후반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이 종장은 가히 '아름답다'라고 부를만하다. 캐롤이 인간 세상에서 받아야 했던 편견과 차별은 이 장면들 속에서 완전히 소멸한다.
우주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