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초엘리트 - 영국을 지배하는 이너서클의 습관, 약점, 그리고 악행
사이먼 쿠퍼 지음, 김양욱.최형우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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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말한다. 투표는 시민의 권리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권리가 의무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시민이 깨어있어야 한다. 안목을 길러야 한다. 후보의 이미지가 아니라 공약을 읽어야 한다. 숙제가 많아지면 공부는 지겨워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나의 결정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똑같다는 것. 상황이 이런데도 민주주의의 위기는 늘 낮은 투표율로 설명되곤 한다. 위기의 본질을 시민 개개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주장했다. 가장 똑똑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한다는 의미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말을 했다간 시대착오적인 엘리트주의자, 권위의식에 가득 찬 똥덩어리, 자기애에 심취한 나르시시스트로 취급받을 것이다.


잠시 편견을 내려놓고 생각해 보자. 가장 현명한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게 정말로 나쁜 일인가? 각자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논의를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의 궁극적 목표를 행복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되지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든 독재든 공산주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늘날 대다수의 국가가 민주주의를 최대의 이상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그것이 최적의 정치체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실제로 그렇기 때문은 아니다. 정말로, 정말로 현명한 사람, 혹은 AI가 있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만 있다면 신성한 선거권 따위 개한테 줘버린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정치에 대한 시민의 무관심이 극적인 반전을 꾀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주 짧은 기간,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발작적으로 솟구칠 순 있겠지만 그 흐름 자체를 바꾸기는 어렵다. 극단적으로 말해 안대를 벗고 동굴에서 나와 뛰어난 안목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적 시민이 절대다수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공급의 측면에서 해결하는 게 현명한 일 아닐까? 나는 시민에게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질수록 위기는 악화할 것이라 확신한다. 대중이 원하는 자유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권리에 가깝다. 이들이 선택과 판단의 자유 때문에 힘들어한다면 선택하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쉽게 말해 누구를 뽑든 상관없이 후보자 자체를 훌륭하게 길러내자는 것이다.


<옥스퍼드 초엘리트>는 현재 영국이 처한 국가적 위기를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기숙학교에 같이 살며 같은 가치관을 공유해 온 철부지들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과거에도 영국의 정치가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로 구성되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세계 대전이라는 상처 속에서 전우로서 함께했던 연대가 있었다. 심지어 그 '엘리트'들은 대중과 함께 참호 속에서 함께 기도를 올렸던 경험이 있다. 평화의 시대에 자란 옥스브리지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기들끼리 기숙학교에 다니며 다른 삶을 산 자들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런 그들에게 공감을 바라는 건, 오히려 바라는 쪽을 탓해야 할 일 아닌가.


대한민국의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회의 상당수는 언론인과 법조인이 차지하고 있다. 그 두 세계는 워낙에 견고해 새로운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나마 지금은 그 구성원들의 성장 배경이 꽤 달라 어느 정도 다양성이 갖춰져 있을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절에 자란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강남의 전문직 자제들이 대부분 명문대에 입학하고 그들이 결국 이 세계에 다수 진입하는 시점이 되면 대한민국은 영국 못지않은 정치적 위기를 겪을 수 있다.


<옥스퍼드 초엘리트>는 민주주의 위기를 공급의 측면에서 바라보게 한다. 내용은 대부분 옥스브리지 출신 정치인들이 얼마나 한심한지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그 주장의 본질에 대해선 깨닫는 바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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