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 아몬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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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성유전이란 아주 쉽게 말해 당신의 경험이 후세로 유전되는 과정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솔깃한가? 내가 외운 영단어나 독서로 쌓은 지식, 스쿼트로 만든 30인치 허벅지를 내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유산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후성유전은 이런 방식으로 동작하지는 않는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배아는 이후에 여러 개의 세포로 분열하는데 이 세포들은 서로 완전히 동일한 쌍둥이다. 신기한 건 어느 시점에 이르러 이 세포들이 머리카락, 뇌, 심장 등 완전히 다른 신체 부위를 구성하는 세포로 변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모든 가능성을 지닌 세포를 우리는 줄기세포라 부른다. 이 줄기세포가 어떻게 구체적 기능을 갖는 세포로 변하는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각각의 세포에 대응하는 줄기세포가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후성유전이란 장차 허벅지 근육으로 변할 줄기세포에 내 30인치 허벅지의 비밀이 담긴 유전코드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후성유전은, 좀 더 미묘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과학계는 한 번 물려받은 DNA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행동 후성유전학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 세상의 번잡함과 마찬가지로 DNA 또한 역동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DNA는 환경이나 맥락에 따라 스위치를 켜거나 끌 수 있다. 위암을 유발하는 DNA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 DNA가 꺼져있다면 평생 건강히 살지만 켜져 있는 사람은 암에 걸리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선 히스톤의 메틸화, 아세틸화와 DNA의 메틸화를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DNA와 히스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DNA는 우리 몸에 필요한 여러 단백질을 생산하는 설계도라고 보면 된다. 그 자체로 하는 일은 없고 RNA가 이 설계도를 베낀 뒤 세포핵을 나와 실제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히스톤은 이 설계도(DNA)를 세포핵이라는 작은 공간 속에 집어넣기 위해 돌돌 감아주는 단백질이다. DNA는 다 풀어냈을 때 2m가 넘을 정도로 대단히 큰 분자기 때문에 히스톤이 없다면 대단히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히스톤이 DNA를 똘똘 감아 우리 몸속에 넣는다는 얘기를 들으면 이것이 어떻게 DNA의 발현을 좌우하는지 눈치를 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히스톤이 DNA를 너무 단단히 감아 넣으면, 이 설계도에 접근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DNA가 생산하리라 예상되었던 단백질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음으로써 우리 몸에 변화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히스톤 메틸화, 그 반대의 작용을 하는 게 아세틸화다.


DNA도 히스톤과 똑같이 메틸화되면 특정 유전체가 침묵하고 탈메틸화되면 활성화된다. 다만 히스톤 메틸화의 경우 언제나 특정 유전체의 침묵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므로, 일반적인 경우 DNA 메틸화는 유전자를 활성화하고 히스톤 아세틸화는 그 반대라고 이해하면 된다.


DNA와 히스톤의 메틸화와 아세틸화는 당연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집에서 살며,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다. 생각해 보면 이는 그렇게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이 세상엔 뭘 어떻게 하든 결국 인간은 정해진 팔자대로 살 것이라는 결정론적 회의주의자보다는 환경과 경험의 변화를 통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더 나은 삶을 위해 주변의 환경을 바꿔왔다. DNA와 히스톤, 메틸화와 아세틸화를 몰랐을 때조차 말이다.


행동 후성유전학이 밝혀낸 과학적 증거는 굳게 닫힌 결정론자들의 마음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기 행위들로 인해 물리적으로 변한 유전자가 나의 후손에게까지 이어진다는 걸 알게 되면 아무리 부정적인 패배주의자도 생각을 고쳐먹을 기회를 갖게 되지 않을까? 만약 결정론자가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생각해 보자. 행동 후성유전학을 모르는 선생님이라면 아주 어릴 때부터 인간은 될 놈과 안 될 놈으로 구분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선생님이 모든 학생을 골고루 살피며 그들의 잠재력을 일깨우리라 기대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경험이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선생님이라면? 이 세상은 더 많은 가능성과 희망으로 차오를 것이다.


이 글에서 변형된 유전자가 어떻게 후세에 전달되느냐까지 기술하지는 않겠다. 그건 내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꼭 한 번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읽어 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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