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중국사 13 : 수당의 정국 이중톈 중국사 13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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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국 후한이 멸망하고 그 유명한 위촉오의 짧은 삼국시대가 끝난 뒤 중국 대륙은 이른바 5호 16국이라는 대혼란의 시대를 맞이한다. 이 난세에는 누구나 왕이 될 수 있었고 그 운명은 채 1~2년이 되지 않는 경우도 흔했다. 5호 16국은 점차 북위, 북제, 북주로 이어지는 이민족들의 북조와 송, 제, 양, 진으로 이어지는 한족의 남조로 양분되어 남북조 시대를 이루나 혼란의 400년을 마치고 진정한 통일 왕조를 이룩한 건 바로 북주를 계승한 수나라였다.


그러나 이 수나라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중국의 남과 북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하느라 백성의 원성을 샀고 결정적으로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해 국운이 소멸한다. 이 수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또 다른 선비족(오랑캐) 출신인 당고조 이연이었다. 이연은 수나라를 끝내고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인터내셔널 대제국 당나라를 세운다.


당나라를 세운 건 이연이었으나 세계가 놀란 '그' 당나라를 만든 건 그의 아들 태종 이세민이었다. 태종 이세민은 여러모로 우리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닮은 점이 많다. 우선 야심이 컸고 왕조 설립에 결정적 기여를 했음에도 후계 경쟁에서는 밀렸다는 점이 그랬다. 두 사람은 형제들을 모조리 잡아 죽인 뒤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왕조의 전성기를 열어젖힌다.


당나라 문화의 핵심은 '국제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황제 자신이 오랑캐였던 탓에 그는 이민족에게 관대했다. 물론 미소를 짓기 전에 한 차례 칼이 들어간 건 사실이었다. 특히 대대로 중국 왕조를 괴롭힌 북방의 유목 민족을 복속시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세민은 당나라 최고의 골칫거리였던 돌궐을 평정한 뒤 그 추장들로부터 '천카간'으로 추대된다. 그것은 중국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세민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대당의 천자인데 카간의 일까지 또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응답은 "만세! 만세! 만만세!"였다. - p.80


나라의 수도 장안에는 페르시아인부터, 이슬람, 위구르, 토번, 중앙아시아의 각종 스탄국, 인도인까지 온 세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던 서시에 살롱을 열고 포도주를 마시며 서역 미녀의 춤을 감상했다. 그들 중에는 고관대작과 유력자들이 많았다. 그냥 살았던 게 아니라, 잘 살았던 것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문화와 풍속이 다른 그들을 국가의 핵심 자원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당나라의 힘이었다.


이중톈은 당나라가 전지구적 대제국이 된 이유를 문화 우열론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문화에도 우열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성격과 성질 면에서 보면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 (중략) 그런데 성질에는 우열이 없어도 형세에는 우열이 있다. (중략) 우세면 확실히 우등하고 또 확실히 강세다. 열세면 꼭 열등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약세다. (중략) 바로 이것이 여러 나라 중 하필 수당이 세계성을 띤 문명이 된 근본 원인이다. - p.228~229


이중톈은 문화적 토대가 빈약한 나라일수록 문을 닫아걸어 우열한 문화의 유통을 막는다고 했다.


선택은 운명을 결정했다. 어떻게든 수당과 거리를 유지하려 했던 돌궐과 회흘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지만 전면적 한화를 택한 일본과 신라는 결국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다. - p.231


이중톈은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중화의 문화를 동아시아에 전파한 공로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도 중화의 문화를 받아들여 열심히 전파했는데도 왜 신라와 일본만 독자적인 발전을 걸었을까?


이것은 모순이다.


당나라가 세계 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문화의 우열이 아니라 지정학적 이점과 운 때문이었다. 우선 지정학적 이점을 따져보자. 당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외국인을 꼽으라면 역시 페르시아인들일 것이다. 뛰어난 문명과 문화를 가진 그들이 당나라에 정착했던 것은 때마침 이슬람제국이 일어나 페르시아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대제국을 이뤄 자웅을 겨룰 수밖에 없었던 이슬람제국은 눈앞에 불을 켜고 노려보는 적들(기독교도) 때문에 동방의 강자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유럽은 아무리 커져도 이슬람이라는 완충지대 때문에 아시아를 넘볼 수 없었고, 또 하나의 제국인 인도는 히말라야가 막고 있는 데다 굽타 왕조 멸망 이후 사분오열된 상태라 당나라를 상대할 수 없었다. 중국은 전 역사를 통틀어 대제국과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인 적이 없다. 그들의 상대는 오직 북쪽과 동쪽의 소수민족 오랑캐들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멸망 당시 이미 900년 가까이 이어져온 노쇠한 국가였지만 당나라는 이제 막 청년이 된 젊은 국가였다. 그런 노인과 싸우는데도 당나라는 전력을 다해야 했다. 이세민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의 안시성을 침략했지만 대패한 뒤 병까지 얻는다. 그는 이 병 때문에 불과 4년 만에 죽음을 맞는다. 이때의 고구려가 이세민의 당나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그때는 아직 고구려 문화의 형세가 당나라에 비해 우세였던 걸까?


그것은 그저 주변국들의 정치 상황과 그들의 선택이 얽히고설켜 일으킨 연쇄작용, 그리고 운의 결과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 대륙 깊숙이 영토를 확장한 적이 있으나 대제국 당나라가 일어설 무렵에는 이미 운이 다해 소멸하고 있었다. 이세민이 왕위를 찬탈하여 내부 정치가 혼란스럽고 아직 북쪽의 돌궐이 평정되지 않았을 때가 우리의 선조들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싸우지 말고 지키자는 자가 왕위에 오르고 중국정벌을 강력히 주장하던 을지문덕파가 사라지자 고구려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 왕위 찬탈자 연개소문의 죽음이라는 대운을 얻은 당나라는 고구려의 혼란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이 중국의 강자들을 모조리 쳐부수고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동일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대왕의 업적은 그 자신의 뛰어난 통치력과 고구려인의 힘, 지혜 덕분이었지만, 역시 중국 대륙이 사분오열하여 혼란스러웠던 상황적 이점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우위에 서는 건 누가 더 정확히 정세를 파악하고, 누가 더 과감히 대응하느냐의 문제였다. 이런 일을 놓고 문화의 우열이니 우세니 설명하는 건 대단히, 대단히 불합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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