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그 자체 - 현대 과학에 숨어 있는, 실재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울프 다니엘손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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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가 실재하며 오직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세계란 우리가 의식한 결과이므로 세계는 이 세상의 사람 수만큼 존재한다는 포스트모던한 생각이, 어떻게 보면 폭력적이라 느껴질 수 있는 객관적이고 유일한 실재로부터 나를 구원하고, 동시에 아주 다양하고 흥미로운 세계로 이끈다는 점에서 상당한 매력을 느끼지만, 결국 그들이 얘기하는 의식의 결과는 뇌 속에서 이뤄지는 일이라 실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해석하는 관점이 여럿이라고 해서 작품 자체가 여럿일 수는 없는 법이다.


확고한 신념은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균열이 갔다. <매트릭스>는 이 세계가 정교한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며 우리가 느끼는 이 모든 경험은 그저 뇌로 흘러들어 가는 전기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데카르트 식으로 표현하면 '통 속의 뇌'고 베르나르 베르베르 식으로 표현하면 데미우르고스들이 갖고 노는 '샌드 박스'인 것이다.


<세계 그 자체>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주장하는 책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든 물리적 세계는 우리 밖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 벽에 머리를 부딪혀볼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결과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실재와 표상을 헷갈리지 말라고 말한다. 표상은 세계에 대한 우리 나름의 이야기일 뿐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수학이나 물리학 자체가 곧 세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저자는 같은 과학자이면서도 이와 같은 생각에 명백한 선을 긋는다. 물리학과 수학은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뛰어나도 실재를 기술하는 수단일 뿐이다. 실제로 두 학문은 끊임없이 오류가 수정되어 왔다. 이건 단지 우리가 이 두 학문을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이 말에 담긴 모순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들이 다루는 물리학과 수학이 곧 세계 그 자체인데 그것이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말인가? 우리 세계는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여 완벽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객관적 실재는 오직 스냅숏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딱 그 순간에만 진실인 것으로.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 잠깐의 진실조차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책을 읽고 '통 속의 뇌'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뿌리 뽑은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어렵다. 논리적으로 증명한다기보다는 세계는 그냥 실재하는 거야, 그냥 그래,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는 물론 내 이해의 한계일 수도 있다. 이렇게 대단한 주장을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번역서로 읽고 이해한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고.


물리적 실재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우리의 의식인 것 같다. 어떤 과학도 아직 의식의 동작 방식을 완전히 풀어내지 못했다. 외부의 자극을 느낄 감각이 없다면 의식도 존재하지 않을까? 신화 속의 신들은 대부분 무에서 '나'를 인식하고 이를 통해 '너'를 추론하여 세계를 만들었다. 이 신화들에 따르면 세계보다 의식이 먼저다. 그렇다면 다시 과학으로 돌아가 빅뱅 당시로 시선을 돌려보자. 빅뱅이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한 세계의식의 깨어남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의식은 어디에, 무엇으로 존재하는 걸까? 모든 물질에 질량을 부여한 힉스장이 세계의식의 물리적 실체라는 아이디어는 어떤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의 뇌는 이 힉스장의 생물학적 결과라는 생각은?


나는 이것들이 다 그냥 짜 맞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빅뱅을 생각하면 역시 이 세계가 실재한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단순한 입자들이 모인 인간이 어떻게 의식을 갖게 됐느냐는 질문을 떠올리면 이 문제는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정말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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