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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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기억에 대한 소설이다. 이제는 지나간 옛일을 오늘의 내가 서술한다. 목소리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가을 햇볕이 아침나절 스며든 벽돌 담장에 손을 댔을 때 전해지는 온기처럼. 소설은 눈으로 좇을 수밖에 없지만 스며드는 감정은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양자는 벽을 그냥 통과하고 어떤 양자는 그렇지 않다. 광자는 빛의 최소 단위이고 광자는 양자다. 우리는 어떤 광자가 벽을 통과하고 어떤 광자가 그러지 못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확률로 기술될 뿐이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시간에도 비슷한 면이 있다. 시간은 대부분 우리의 인생을 투과해 지나간다.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이다. 움켜쥘 수도, 멈춰 세울 수도 없다. 그런데 어떤 시간은 우리 삶을 강타한 뒤 튕겨져 나온다. 그 충격으로 삶은 멈춰버린다. 시간은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이라 부른다. 이후의 삶은 예기치 않게 더해진 이 이물을 녹이고 삭이는 일들로 채워진다. 멈췄던 시간은 어느덧 다시 흐르고 기억은 우리 몸에 골고루 퍼져 은은한 잔향을 남긴다. 가을 햇볕이 아침나절 스며든 벽돌 담장, 거기서 전해지는 온기처럼.


어떤 소설들은 이야기 이상을 담는다. 그런 소설들을 읽고 나면 무언가 깨닫게 된다. 진리라는 말은 거창하고 낯 간지럽고, 또 너무 명확하다. 확실히 뭔가를 알게 됐다는 게 아니다. '알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 모호함이 오히려 내 삶을 나아가게 만든다. 도착한 그곳이 종착지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알 것 같다'는 느낌을 간직한 채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언젠가 이 느낌은 다시 기억 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라앉을 것이다.


앤드류 포터는 제임스 설터와 비슷한 면이 있는데 좀 더 따뜻하다. 설터는 마음에 공백을 남기고, 포터는 꺼내 올린다. 나는 이런 류의 소설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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