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5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는 순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더 이상 보탤 말이 필요 없는 완벽한 문장이다.


하라 료라는 작가는 처음인데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계에서 유명한 사람인 것 같다. 사진을 보니 콧수염이 멋있다. 작가의 얼굴을 봤기 때문인지 시리즈의 주인공 사와자키의 말과 행동에서 저절로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의 시선 따윈 상관없고, 속세에도 큰 관심이 없지만, 자기 일에 확실한 원칙이 있고 고집스럽다. 사무실엔 이미 죽은 파트너의 간판이 여전히 달려 있다. 페인트 칠은 다 벗겨졌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낡은 블루버드. 그럼에도 궁색해 보이지 않는 멋쟁이가 바로 사와자키란 탐정이다. 그에게서 하라 료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그저 착각일까?


배경은 버블경제가 무너진 후로 보이나 세계를 거의 한 손에 쥐고 흔들었던 일본인의 자신감이 여전히 캐릭터에 남아있다. 사람들은 어딘가 모르게 여유 있고, 종종 연극적 허세까지 보인다. 별것도 아닌 말에 '나루호도'라고 읊조리며 쓸데없이 무게를 더하는 일본 드라마 같은 분위기라든가, 적들이 코 앞에 다가올 때까지 낮잠을 자다 문득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며 그들을 초토화시키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라든가, 꼭꼭 숨기는커녕 굳이 굳이 수사 기관을 맴돌며 단서를 남기고 수다를 떠는 자의식 과잉의 만화 속 범죄자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뭔가가 문장 곳곳에 배어있다. 이런 도드라짐이 종종 몰입을 방해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제일 아쉬운 점은 악인의 실체가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이다. 전말이 밝혀지고 나면 정말로 이자가 사건을 이토록 복잡하게 꼬을 수 있을 만큼 능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아무리 사람의 약점을 잡고 쥐어짠다 한들 내 수족처럼 부리며 여러 사람을 죽이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이 공백을 단단하게 메워줄 캐릭터들의 동기, 심리 묘사, 관계가 부족하다 보니 이야기는 설득력을 잃고 머쓱한 장면을 연출한다. 독자는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주춤댈 수밖에 없다.


그래도 탐정 사와자키의 개성만큼은 확실히 독보적이다.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시원시원하다. 트릭과 추리에 집중하기보다는 캐릭터와 구성에 더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다. 그 힘이 이야기에 재미를 싣고 달리게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 고민 없이 덮을 수 있다.


한 가지 더. 레이먼드 챈들러의 팬이라면 하라 료에게도 한 번쯤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누가 '필립 말로'의 팬 아니랄까 봐 사와자키에게도 그의 냄새가 느껴진다. 다다미 방 위에 앉아 호지차를 마시는 말로를 보는 것처럼 이질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묘하게 섞인 색채가 오히려 신비로운 매력을 풍긴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하고 재미없는 소설은 태워야 한다. 필립 말로와 사와자키는 소설 속에서 살아남았고, 소설 밖에서 화형을 면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