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토머스 해리스 지음, 이창식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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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에서 자유를 얻은 한니발 렉터의 살인 여행이 다시 시작된다. 렉터의 새 도살장은 이탈리아의 피렌체다. 내국인을 압도하는 고어 구사 능력과 역사 지식으로 박물관 관장에 임명된 한니발 렉터는 그곳에서 변함없는 고급 취향을 향유하며 포식자의 삶을 이어간다. 육체적 감금이 없는 렉터에게 인간의 세계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하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얻어내는 이 초월적 능력은 그가 소시오패스 살인마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매력적으로 보인다.


연쇄 살인범을 검거해 일약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증거 조작 혐의로 명예가 실추된 이탈리아 경찰 파치의 도전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도 뛰어난 감각과 수사 능력을 지닌 경찰이었지만 렉터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파치가 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고작 렉터의 가면을 벗겨내는 것이었다. 정체가 드러난 렉터는 피렌체에서 원하는 만큼 살인을 저지른 뒤 미국으로 향한다. 이 난동의 배후인 메이슨과 그의 오래된 연인 크라리스 스탈링이 사는 나라로.


메이슨은 한니발 렉터의 희생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그것이 정말로 '생존'한 것인지 의문을 품을만한 상태이긴 했다. 그는 눈꺼풀과 코와 입술이 없었다. 눈이 마르지 않게 안경은 끊임없이 물을 뿌려줘야 했고 호흡은 기계에 의존했다. 거동은 불가했다. 얼굴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는 한니발 렉터가 메이슨이 기르는 개에게 먹이로 줬다. 그중 일부는 메이슨이 직접 먹었다. <한니발> 속 렉터의 범죄 행위는 여자들의 가죽을 뜯어 옷을 만드는 것 정도는 애교로 만들 만큼 잔인하다.


바늘 하나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구성을 보여준 <양들의 침묵>에서 유일하게 모호했던 부분은 왜 클라리스 스탈링이 한니발의 인터뷰어로 선정됐느냐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 연수도 다 마치지 않은 FBI 교육생이었다. 소설은 행동과학부에 워낙 일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고 얼버무리지만 미연방수사국의 인재풀이 교육생을 동원할 만큼 얕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동과학부의 수장 잭 크로포드는 스탈링의 든든한 지지자였고, 시리즈 내내 유사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심리적 유대가 잭 크로포드의 잔인성을 숨겨주는 가림막이 된다. 잭은 누구보다 렉터를 잘 알았기에 이 살인마의 파트너를 아주 유심히 골랐을 것이다. 그는 렉터와 스탈링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측했음이 분명하다. 스탈링이 견뎌야 했던 그 모든 절망이, 사실은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의 철저한 계산으로부터 나왔다는 바로 이 아이러니가 클라리스 스탈링의 삶을 이해불가한 비극으로 만든다.


영화 <한니발>과 소설 <한니발>은 결말이 완전히 다르다. 원작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소설 <한니발>의 결말은 소름이 돋는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괴기스럽다. 경우에 따라 다시는 토마스 해리스의 책을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요즘 나오는 웹소설이었다면 독자의 항의로 작품이 내려지거나 작가가 이야기를 수정했을지도 모른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마주한 이 장난 같은 운명은 상실과 좌절로 점철된 비극의 수준을 넘어선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무려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 그녀의 삶보다, 내장을 쏟은 채 발코니에서 목이 매달린 파치의 운명을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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