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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때때로 세상은 온통 암흑으로 느껴진다. 한참을 허우적대다 쓰러지면 더 이상 일어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쓰러진 자리엔 어둠이 쌓여 담이 되고 가끔 스쳐가던 한 줌의 빛조차 막아버린다. 무게도, 냄새도, 색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암흑이 짓누르는 무게에 온 몸은 깊이 가라앉는다.
육체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그 한계를 깨달을 때마다 멈추고 주저앉는 시간은 끝 모를 불안을 만들어낸다. 불안에 빠지면 자신에게 이 시간의 한계를 뚫고 미래를 열어갈 능력이 있다는 걸 잊게 된다. 작가는 그 능력을 이렇게 말한다.
미래를 기억하기.
나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무한하다. 내가 벽을 허물고 일어나 타인의 목소리를 품에 안고 내 목소리를 그에게 들려줄 때, 비로소 나는 우리가 되어 영원으로 이어진다. 좋았던 과거를 기억하는 건 비관의 먹이가 되지만 미래를 기억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려준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미래를 기억'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최근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불행과 패배를 상징한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이들을 동정하는 편과 그렇지 않은 편으로 나눠 등을 돌리고 살아왔다. 이 극단의 시대에, 혐오와 무관용의 칼날을 헤쳐나갈 방법을, 김연수는 이야기한다.
나는 지난날 김연수를 외면해왔는데 대개는 그가 펼치는 이야기가 오글거리고 희망에 대한 강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본 청춘 드라마에 나오는 열혈 담임선생님처럼 말이다. 한두 권만 읽어봐도 이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편견인지를 깨달을 수 있지만, 비로소 이 단편집을 통해 나는 이 작가가 정말로 대가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연수는 완전히 다른 8개의 소설을 한 개의 주제로 정확히 꿰뚫는다. 몽골의 사막에서 조선의 바다로, 북한의 수도원으로, 도쿄의 진보초로, 작가는 경계를 알 수 없는 다채로운 이야기로 독자를 이끌며 소설이란 과연 시공간의 한계가 없는 궁극의 이야기 수단이구나 라는걸 깨닫게 해 준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으며 나는 비로소 소설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