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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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최고의 소설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최고의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낙원 같은 소설이다.


남은 5개월 동안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 책은 올해 최고의 소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7개월을 곰곰이 돌아보니, 최고의 소설이 아니라 최고의 책으로 꼽게 될 것 같다. 내용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이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와 수학자들이 바로 그 위대한 발견을 하는 순간을 소설로 옮긴 것이다. 지금부터 그 주인공을 호명하겠다.


1. 공기 중에서 질소를 추출하여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킨 프리츠 하버

식량의 산술급수적 증가가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따라잡지 못해 인류가 굶어 죽게 될 거라는 맬서스의 저주를 극복한 건 하버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소를 이용한 합성 비료는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인구의 폭발적 증가에 죄책감을 느꼈는지 애국자였던 하버는 독일을 위해 염소 가스를 활용한 생화학전을 창시하기도 했다. 염소 가스의 피해 규모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인 독일마저 생화학전의 금지를 결의하는 세계 조약을 체결할 만큼 크고 치명적이었다. 훗날 그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쓰인 염료 프러시안 블루를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시안화물을 이용하여 치클론 B를 개발하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기체로 선정됐다.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이었다.



2. 블랙홀의 어머니 슈바르츠 실트

프리츠 하버의 염소 가스가 전장을 휘덮는 동안 참호 구석에 박혀 아인슈타인이 고안한 일반상대성 이론의 방정식을 풀어낸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 책의 두 번째 주인공 슈바르츠 실트다. 방정식을 만들어낸 당사자조차 그 '해'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못 박은 일을, 편안한 별장도 아닌 전장에서, 전자계산기나 애플 실리콘이 탑재된 맥북 프로, 대량의 계산을 처리할 클라우드 서비스도 이용하지 않고 해냈으니 그 천재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조차 없다. 그는 자신이 찾아낸 해가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블랙홀의 존재를 예견하는데 놀라 이후에는 자신의 해가 잘못됐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슈바르츠 실트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지 얼마 안돼 전장에서 숨을 거둔다. 이 책은 사실을 토대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내가 만약 작가였다면 천재 화학자 하버가 살포한 염소 가스를 슈바르츠 실트 살해의 유력한 용의자로 암시하고 싶은 강력한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3. 진정한 천재 수학자 그로텐디크

필즈상 수상자 몇 명이 달라붙어도 해결할 수 없던 난제를 몇 주 만에 홀로 해결할 정도로 천재였던 그로텐디크는 그 압도적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수학자다. 심지어 어린 시절 유대인 수용소를 전전하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그가 이룩한 업적들에 놀랍다고 말하는 건 지극히 소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끔찍한 유년 시절 덕분에 그는 평화와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정치관을 갖게 됐는데 이 탓에 반전-반핵-환경 보호-생태계 보전을 핵심으로 하는 사상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수학과는 관계없는 수많은 기행을 벌이다 생활고로 80년대에 학계로 돌아왔지만 그가 제출한 연구 결과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로텐디크는 80년대 말에 완전히 수학계를 떠나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숨어 지냈다. 너무 똑똑해도 문제라는 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나 떠올릴만한 말이다. 그러나 그로텐디크를 보면 이 외에 어떤 말을 떠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4. a+b=c, 모치즈키 신이치

그로텐디크의 인생은 모치즈키 신이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모치즈키 신이치는 a+b=c라는, 일명 abc가설을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수학자이다. 그는 증명 과정에서 스킴과 에탈 코호몰로지 이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데 이것이 바로 그로텐디크가 창안한 이론이었다. 그가 abc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기술한 논문은 수백 페이지에 달해 아직까지도 검증이 끝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론에 담긴 심각한 오류를 지적하며 웬만한 수정으로는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반면 모치즈키 신이치의 교토 대학 동료들은 그의 증명이 완벽하게 끝났다고 주장한다.



5. 서로를 혐오했던 라이벌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

양자역학을 창시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하이젠베르크는 그 업적과 비례할 정도로 복잡한 행렬 역학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행렬은 순수 수학에 속해 물리학자들에게는 대단히 생소했다고 한다. 논문 역시 엄청 난해해서 전자기력과 약한 핵력을 통합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스티븐 와인버그 조차 "마법 그 자체"라 언급했는 데, 나는 이 말이 '솔직히 이해는 못 하겠지만 뭔가 해낸 것 같으니 적당한 선에서 인정해 주자'는 의도로 말해진 대단히 지적이고 사회적인 표현이라 생각한다.


하버의 업적이 인류의 기아 해결과 대량 학살에 모두 기여하고, 아인슈타인의 발견이 에너지의 실체와 파괴를(E=MC스퀘어) 동시에 밝혀냈듯, 과학의 역사는 수많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나는 여기에 하이젠베르크의 끔찍한 이론이 만들어낸 최악의 라이벌 슈뢰딩거의 이야기를 추가하고자 한다.


슈뢰딩거는 다른 물리학자와 마찬가지로 본인만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 그걸 어려워하는 다른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저 오만하고 어린 독일 놈을 증오했다. 슈뢰딩거는 양자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보다 쉬운 방법을 찾는데 몰두해 그 유명한 '파동함수'를 만들어낸다. 파동함수는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에게 익숙한 미분방정식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에 학계의 환영을 받았다.


파동함수의 탄생 이후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을 거들떠보는 물리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훗날 양자역학의 창시자로 호명되는 천재 물리학자지만 당시에는 잊혀가는 명성을 두려워하는 어린 독일 놈에 불과했던 하이젠베르크. 그는 슈뢰딩거의 강연장에 허락도 없이 올라가 이 모든 것이 엉터리라며 칠판 가득 자신의 행렬을 써 내려가다 관중의 야유를 받고 경비원에게 끌려나가는 추태까지 보인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어떻게 해서든 혐오스러운 오스트리아 바람둥이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절치부심 연구에 몰두한다. 그러다 자신이 똥처럼 여기던 바로 그 파동함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에피파니를 경험한다. 모든 역사의 아이러니가 말해주듯, 그것이 바로 하이젠베르크가 펼친 대역전극의 서막이었다.


한편 슈뢰딩거가 파동함수를 고안해낸 곳은 크리스마스 휴가로 떠난 스위스 아로사로 알려져 있다. 동행한 여자는 부인이 아니었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역사적 사실 사이사이 비어있는 간극을 이야기로 채워 넣은 픽션이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서로 다르지만 연작 소설로 읽어도 될 만큼 교묘하게 엮여있다. 명심해야 할 건 이 소설이 사실을 바탕으로 썼다고 해도 결코 사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 벵하민 라바투트는 <프러시안 블루>에는 지어낸 문장이 단 하나밖에 없는 반면 다른 소설들은 좀 더 자유분방하게 썼다고 말한다. 자유분방을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두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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