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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ㅣ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1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오랜만에 조선을 떠나 다른 땅과 시간을 구경하니 흥미가 남달랐다. 이제는 남의 땅이 되어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분노가 집중을 더했을 것이다. 당시에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같을지는 미지수다. 땅의 모양과 크기, 산과 강의 구성, 기후부터가 다르다. 우리가 만약 그 시간대로 날아가 그들과 만날 수 있다면, 그럼에도 한 핏줄임을 의심할 수 없는 표식을 서로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드문드문 완벽하지는 않아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고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수 있을까?
당시 지도를 보면 고구려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단 두 개의 나라와 마주 보고 있는 지금도 이렇게 숨이 막히는데, 그 많은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고 외교를 맺고 강토를 관리해왔을 그들을 떠올리면 절로 눈앞이 캄캄해진다. 어지간한 배짱과 지혜, 힘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총 700년에 달한다. 그동안 한반도는 삼한과 가야, 옥저 등이 일어났다 사라져 백제와 신라로 압축됐고 중국은 한나라를 거쳐 위, 촉, 오의 삼국시대, 5호 16국, 남북조를 거쳐 수와 당나라까지 수많은 국가가 명멸하였다. 새로운 왕조가 탄생할 때마다 이 북방의 맹주는 늘 목 앞에 드리운 칼날이었다. 고구려는 여러 나라가 난립할 때는 외교를 통해 힘의 균형을 유지했고 하나로 뭉쳐 강해졌을 땐 힘으로 맞서 무너뜨렸다. 광개토대왕의 무력 덕분에 강력한 철기병으로 적진을 초토화하는 여포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 위치에서 700년을 살아가려면 창과 칼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전쟁은 이기든 지든 국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 복잡했던 중국 대륙을 다시 한번 통일해낸 최강 수나라가 괜히 망했겠는가? 우리는 고구려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지만 특히 그들의 정치 외교술에선 무지가 더해지는 것 같다. 앞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 힘과 정치의 교묘한 균형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사보다도 긴 고구려의 역사를 조선의 역사보다 한참이나 얇은 두께로 펴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남아있는 사료가 많지 않고, 너무 오래되었으며, 그나마 남의 땅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된 지역도 꽤 최근까지 청나라 왕조가 시발한 성지로 간주되었을 정도다. 심지어 그 비문은 일본과 중국이 독점하여 각각 역사 왜곡의 원료로 삼고 있다. 자국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타국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부조리. 그러니 그 후손들이 향수와 함께 깊은 분노와 아쉬움을 느끼는 거 아니겠는가?
이 책은 고구려의 역사를 정말 한 권으로 읽을 수 있게 잘 요약해놨다. 그러나 그만큼 아쉬움도 크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고구려의 문화와 제도, 정치를 좀 더 깊이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