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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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가 모조리 의심받는 이 세상에서도 철학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모리스 리즐링의 말처럼 "결국 인생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두 개의 물리력에 속박당한 채 평생을 살아간다. 저주와 같은 이 힘은 중력과 시간이다. 특히 철학에 양분을 제공하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우리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며 끈질기게 죽음을 향해 끌고 간다. 미약해 보였던 그 힘은 점점 강해지며 우리의 발걸음을 느리게 한다. 철학은 그 느려진 속도를 체험하는 순간 태어난다. 시간은 우리 앞에 문득 마지막 장의 장막을 펼쳐놓는다. 장막은 굳게 닫혀 있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마지막'이라는 벌레는 온 마음을 헤집고 다니며 불안과 상실의 공포를 낳는다.


에피쿠로스는 이 두려움을 무시로 해소하려 했다. 그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현재가 아니며, 죽음이 현재일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p. 485) 우리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것들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은 남아 있는 자들이 감당할 몫이지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보부아르는 에피쿠로스의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보부아르가 경멸한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 즉 '늙음'이었다. 우리가 청년으로 태어나 청년으로 죽는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늙는다는 게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보자. 그건 감기몸살의 오한과 무기력을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 같은 느낌, 물에 젖은 솜옷을 걸친 채 매일 100km의 행군을 감행하는 느낌일 수도 있다. 뭐가됐든 늙는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그 끔찍함에 눈이 멀어 우리는 일종의 인지적 함정에 빠진 건 아닐까? 노화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절망에 빠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노화는 내가 반드시 맡아야 할, 바꿀 수 없는 배역이지만 그 배역을 어떻게 연기할지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보부아르는 결국 '우리'라는 연대 속에서 우울의 치료제를 찾은 것 같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좋다. 그들의 계획 안에서 내 계획을 발견하면 내가 죽어서 무덤에 묻힌 후에도 내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p. 494)


기차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와 몽테뉴처럼 죽는다. 새벽에서 황혼을 잇는 이 철도를 따라 소크라테스와 루소와 소로와 쇼펜하우어와 에피쿠로스와 시몬 베유와 간디와 공자와 세이 쇼나곤과 니체와 에픽테토스와 보부아르가 차례차례 기차에 오른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덜컹거리는 의자에 앉아 우리를 마주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것은 수업이 아니라 여행이다. 강의를 듣는 게 아니라, 우리는 대화를 한다. 기차의 속도는 간혹 고개를 돌려 경치를 감상할 수 있을 만큼 느리다. 레일을 따라 울리는 규칙적인 덜컹거림이 포근한 음악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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