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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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좋아한다면 브라이언 그린의 책을 읽으며 행복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읽어본 적이 없다면 진심으로 부럽다. 그린의 책을 읽는 동안 최소한 수개월은 즐겁게 보낼 수 있을 테니까. 굳이 따를 필요는 없지만 순서를 얘기하면 <엘러건트 유니버스>, <우주의 구조>, <멀티 유니버스>, <엔드 오브 타임>이다. 음, 써놓고 보니 출간 순이랑 똑같다. 하하.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을 받은 양자 물리학 또는 초끈이론 최고의 입문서다. 제목 그대로 우.아.하.다. <우주의 구조>는 좀 어렵긴 하지만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견딜만하다. <멀티 유니버스>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바운스 바운스 한 평행우주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주 깔끔하게 정리한다. 무한한 우주의 무한한 시간 안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리고 <엔드 오브 타임>이 왔다. 때때로 전능한 신이라면 자신을 무능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모든 걸 아는 존재니까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겠지만 실제로 행할 수는 없다. 신에게 불가능한 게 있다면, 물론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이것이 유일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주에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무한한 우주의 무한한 시간 속에서 모든 일이 가능하다면, 공간과 시간이 '무'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할까? 아무리 작은 집합이라도 공집합을 포함한다. 우주처럼 무한한 집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엔드 오브 타임>은 시간의 종말에 대한 책이고 그 가능성을 같이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이는 책이다. 더 놀라운 건 아무런 의도를 갖지 않는 단순한 물질의 집합체가 의식이란 걸 갖게 된 것, 나아가 그 의식의 종말까지 내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는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까? 태양은? 초인류들은 태양이 식고 난 다음에도 살아갈 방법을 찾아낼 정도로 충분히 똑똑할 테지만 우주 자체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생각, 의식, 사고는 모든 물질이 소멸한 뒤에도 남을 수 있을까? 언젠가 우리 인류는 물질의 한계를 극복해 영원히 존재하는 신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복잡다단한 현실의 고통이 하찮게 느껴진다. 거대한 바다는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비에 아파하지 않는 법이다. 현실의 허물을 벗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가 나 자신을 바라보면, 이 큰 우주에 지구라는 별이 태어나 초기의 몇 개 원소가 결합하여 새로운 분자를 만들고 그중에 하나가 물이 되고, 거기서 생명체가 탄생해 이제는 그 과정을 돌이켜보는 지적 존재가 됐다는, 실로 기적이라는 말 말고는 더 이상 표현할 길이 없는 경이로움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언젠가 인간의 의식은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극복할 수도 있다. 뇌도 생명도 결국엔 우주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원소들의 특정한 배열의 결과물일 뿐이니까. 저 머나먼 우주에는, 혹은 미래에는, 사고가 가능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물질의 집합체가 존재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의식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굳이 단백질 덩어리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오직 생명만이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왜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어떤 모습이 가능할까? 이어지는 상상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든다.


<엔드 오브 타임>은 브라이언 그린의 책 중에서 가장 과학적이지 않은 책이다. 실제로 6장 '언어와 이야기: 마음에서 상상으로'부터 9장 '지속과 무상함: 숭고함에서 최후의 생각으로'까지 약 18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이른바 빅 히스토리 류의 책들이 논하는 인류와 문화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미 그런 내용을 많이 접한 사람이라면 지루할 수도 있지만 얼핏 우리의 일상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물리학을 인간의 삶에 연결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엔드 오브 타임>은 가장 과학적이지 않은 책이지만, 오히려 그의 저작 중에서 생각할 거리를 가장 많이 던져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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