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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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에세이를 들고 걷는 출근길은 늘 가볍다. 이번에는 무라카미씨가 평생 모아 온 티셔츠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동안 이 작가가 출간해온 수많은 시시껄렁한 에세이 중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축에 속한다. 고작 티셔츠가? 나도 참 의외다.


지금도 웬만해서는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성격인데 어릴 적엔 수집욕도 꽤 있었다. 자랑할만한 건 우표 정도. 수집을 멈춘 건 오래지만 400년 뒤의 내 후손이 큰 몫을 잡아 각박한 인생을 극복할 기회로 쓰라고 잘 모셔뒀다. 가치가 떨어질까 봐 거의 열어보지도 않는다. 이거 말고는 책 정도가 있는데 고르고 골라 천 권 정도가 남아있다. 치매로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는 이상 이것만큼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책이 없어지면 팔다리가 뜯기는 기분이다. 햇빛을 받아 누렇게 변색된 걸 봐도 가슴이 아프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하나 종이에 싸서 보관하고 싶지만, 나나 걔들이나 그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온몸으로 맞는 거 말고는 도리가 없지 싶다. 게다가 책은 엄연히 '사용하는 물건'이니까.


뭔가를 모은다는 건, 반드시 그걸 가져야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도 있겠지만 내게는 버릴 수 없다는 쪽이 더 가깝다. 모을라고 모은 게 아니라 버릴 수 없어서 쌓인 것이다. 그렇다고 쌓인 물건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러니까 사실 수집이란 말은 맞지 않을 수 있다.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소유한 게 아니니까. 우연한 기회로 만나 그저 쭉 같이 살게 된 것이다. 한 번 인연은 평생 인연. 이것이 바로 나의 수집이다.


하루키의 티셔츠도 그렇게 해서 모인 게 아닐까? 쓰는 글들을 볼 때 고급 패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페이보릿은 티셔츠인 것이다. 똑같은 무지 티셔츠가 한두 색깔로 수십 장씩 있을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실제로는 독특한 그래픽이 얹힌 귀여운 티셔츠를 좋아한다. 소문난 달리기 광이다 보니 대회를 나갈 때마다 기념품으로 나눠준 티셔츠들도 한 무더기다. 여러 나라에 번역 출간될 때마다 각 나라에서 홍보용으로 제작한 티셔츠들도 많은데, 고이 모셔둘 뿐 실제로 입은 적은 없다고 한다. 어지간한 나르시스트가 아니고서야 자기 책 제목과 이름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티셔츠를 정말로 좋아한다. 풍파를 맞아 하얗게 바랜 것들은 달리기를 할 때만 입다 그것마저 힘들 정도로 낡아버리면 잠옷으로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무라카미 T>는 여러모로 공감이 가는 책이었다. 티셔츠도 좋고 무라카미도 좋고 달리기도 좋다. 거기다 풀컬러로 찍힌 티셔츠들이 페이지마다 실려 있으니 뭐랄까, 쇼핑하는 마음으로 훌훌 읽어버렸다. 몇 배는 상쾌한 에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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