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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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책은 재미가 없다. '천국 대신 지옥을 선택한 살인자와 세속의 정의를 믿는 아마추어 탐정. 범죄의 소굴에서 벌어지는 서스펜스 누아르'라는데 지옥을 입에 달고 사는 주인공은 중2병이 심하게 온 애 같고 세속의 정의를 믿는 건 맞지만 아마추어 '탐정'이라고 부르기엔 모자란 데가 한참 많은 수사 방식, 범죄의 소굴은커녕 그냥 조금 복잡한 일상생활로 보이는 배경 탓에 서스펜스도 누아르도 느낄 수 없는 게 바로 이 책 <브라이턴 록>이다.


<파리 대왕>을 지은 윌리엄 골딩이 '그레이엄 그린은 20세기 인간의 의식과 불안에 대한 궁극의 기록자다.'라고 평했어도, 고전의 진정한 부활로 여길만한 <넛셀>의 작가 이언 매큐언이 이 책에서 얻은 교훈을 '진지한 소설이 흥미진진한 소설이 될 수 있으며, 모험 소설이 관념 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들이 무엇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대작가들이 단순히 립서비스를 하진 않았을 테니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찬찬히 읽고 고전의 정수를 느껴보기 바란다. 아무튼 나는 포기.


소설가 J.M.쿳시는 책 뒤의 해제에서 그레이엄 그린의 작가적 혈통을 조지프 콘래드의 직속 후배이자 위대한 첩보원 존 르 카레의 선배로 정의한다. 조지프 콘래드의 책은 <암흑의 핵심>밖에 읽은 적이 없지만 적어도 그 책은 이렇게 지루하진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실제 MI6(영국 첩보부) 소속이었다는 점, 그리고 서사를 질질 끈다는 점에선 존 르 카레와 확실히 비슷하지만 이 위대한 첩보원의 지루함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끈끈한 빌드업이라는 점에서 훨씬 쫄깃하다. 서스펜스 누아르를 읽고 싶으면 곧장 존 르 카레를 향해 달려가는 게 유익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가 너무 '젊다'면 레이먼드 챈들러는 어떤가? 그레이엄 그린보다 훨씬 옛날 사람임에도 챈들러의 소설은 더 현대적이다.


분명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어디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이언 매큐언의 평에 힌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험 소설과 관념 소설. 쉽게 말해 장르와 문학 사이. 그레이엄 그린도 자신의 작품을 줄곧 오락 소설과 진지한 소설로 구분했는데 <브리이턴 록>이 어디에 서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누군가는 이 소설이 오락과 진지 사이를 아슬아슬 줄타기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내 보기에 이야기는 줄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곤두박질쳐버렸다.


'헤일은 브라이턴에 온 지 세 시간도 안 되어서 그들이 자기를 죽일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멋진 첫 문장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집으로 들고 왔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시작이 오랜 방황 끝에 흐지부지 마무리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브라이턴 록>은 기어이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야 만다. 아마추어 '탐정'이 심령술사를 찾아가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 사건의 단서를 찾으려 할 때 이 책을 덮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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