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챈들러 - 밀고자 외 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승영조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이름을 들어온지는 꽤 오래됐다. 하드보일드 마니아로서 그 이름을 외면하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드보일드란 감정이 배제된 담백한 문체를 뜻한다. 감정 앞에서 구구절절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 산뜻함은 일반적인 상상과는 다르게 오히려 감정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서술하지 않았기에 그 공백을 스스로 채워야 한다. 읽는 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감정은 다양한 형태와 크기를 갖는다.


그래서 하드보일드는 호불호가 갈리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끝없는 상상의 보고가 되겠지만 누군가에겐 딱딱하게 굳은 시체들의 연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취향은 어쩔 수 없다. 나도 반대되는 글들은 전혀 읽지 못하니까. 내게 감정의 홍수는 극도의 피곤함으로 다가온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탐정 소설가다. 탐정소설과 하드보일드, 이 두 가지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포기할 이유가 될 거라 생각한다. 하나만 해도 유별난데 두 개를 동시에 하니 호불호도 두배가 된다. 하지만 불호에 선 사람이라도 레이먼드 챈들러라면 한 번쯤 가던 길을 멈추고 일탈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격이 낮은 펄프 픽션을 문학의 경지로 올려놓은 사람이다. 팬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필립 말로(챈들러가 창조한 탐정)를 보고 있으면 셜록 홈즈는 스피드큐브를 갖고 노는 부잣집 도련님처럼 보인다. 셜록 홈즈에게 추리가 지적 유희였다면 필립 말로에겐 돈벌이였다. 두 캐릭터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태어난다면 셜록 홈즈는 변호사가 됐을 거고 필립 말로는 더러운 뒷골목에서 흥신소를 운영했을 것이다. 챈들러가 창조한 탐정들은 잰 체하지 않는다. 편안한 소파에 앉아 대저택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살인을 추리할 여유는 없다. 사건의 전말을 밝히려면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서야 한다.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처맞는 건 약과다. 항상 등 뒤를 겨누는 총부리를 느껴야 한다. 필립 말로가 딛는 땅은 늘 진흙탕이다.


챈들러의 작품이 동종의 다른 소설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단언컨대 '압도적인 완성도'다. 그러니까 챈들러는 펄프 픽션을 읽는 사람을 펄프 픽션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격이 낮은 대중소설이라 생각했다면 그렇게 치밀한 구성을 고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읽는 사람들은 차이를 모를테니까, 그저 선정과 충격, 그들이 바라는 조미료를 듬뿍 버무려 냄새나는 고기를 가렸으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 차이를 알았기에 도저히 그렇게는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한때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그가 친구에게 편지로 전한 글이다.


나는 글쓰기로 돈을 벌지 못했어. 너무 느리게 쓰고, 너무나 많이 버렸거든(p.590).

나는 본격소설을 쓰는 것만큼 공들여 펄프 스토리를 썼는데, 공을 들인 것에 비해 수입은 너무 빈약했습니다(p.590).


한 막이 끝난 뒤 돌아보는 인생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챈들러로 하여금 한탄을 자아냈던 그 고민이 오늘날 그를 독보적인 자리에 올려 놓은 요인이 됐으니 말이다. 무대 위에 서 있는 동안은 지켜보는 사람도, 그 위에 선 사람도 그 이야기의 의미를 명확히 알려줄 수 없다. 나에게 소원이 있다면 저 당시로 날아가 챈들러에게 그의 미래를 귓속말로 남기는 것이다. 다 믿기야 힘들겠지만 그래도 하루쯤은 자신이 버린 글들에 기분 좋은 확신을 얻지 않았을까?


나는 하드보일드의 오랜 팬이었지만 이제 와서야 챈들러를 읽게 됐다. 그래서 다행이다. 나의 즐거움은 이제 막 시작된 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