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회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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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오래전 이긴 하지만 <한자와 나오키>를 처음 봤을 때 그 몰입감은 대단했다. 금융회사에서 벌어지는 부정과 모략, 음모와 배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혈혈단신으로 돌파해 나가는 한자와 나오키. 등장인물들 간의 수싸움에 깊이가 있었고 클라이맥스의 쾌감은 소년 만화처럼 폭발적이었다. 시청률은 고공행진이었으나 제작비가 너무 커져 차기 시즌 제작이 지지부진하던 차에 멀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최근에 이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 한국에 출간된 것이다. 옛 기억에 다시 한번 정주를 마음먹었으나 권수가 많아 포기. 그 옆에 동일한 작가가 쓴 이 책 <일곱개의 회의>를 집어 들었다.


저자 이케이도 준은 은행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해 이후 작가로 전업했다. 경험을 살려 주로 은행, 대기업 등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추잡한 일들을 이야기의 원료로 삼는다. <일곱개의 회의>는 그 전형에 속하는 소설로 대기업과 그 계열사 그리고 협력업체 간의 비리를 다룬다.


<한자와 나오키>와는 달리 이 소설엔 주인공이라 할만한 인물이 없다. 제목이 암시하듯 몇 개의 이야기가 마치 연작 소설처럼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몰입감은 기대에 한참을 미치지 못한다는 게 솔직한 평이다. 500페이지 짜리 단권으로 엮기엔 이야기가 너무 산만하다. 구성의 약점은 등장인물의 평면적 묘사로 이어지고, 안 그래도 주동자가 없어 이입할 대상을 찾기 힘든 소설을 더 가볍게 만든다. 깊이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야기는 얇디얇다. 이런 걸 바로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장점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는 궁금하다는 점이다. 이제부터인가? 하는 기대감은 오래지 않아 정말 여기까지인거야? 하는 대답 없는 외침으로 끝나지만 기대와 실망의 밀당을 반복하며 탈독을 방지하는 최소한의 텐션은 유지한다. 끝나고 나면 '역시 이 사람은 아니었어', 하는 연애를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기대가 지나친 탓이라고 한다면 글쎄, 이미 <한자와 나오키>를 봐버린 걸 어쩌란 말입니까?


이야기가 단순해 중간 중간 몇십 페이지를 건너뛰어도 읽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500페이지의 빵빵한 체구는 대부분 물살이다. 읽는 게 느린 사람도 며칠이면 충분할 것이다. 집 밖에 나서기가 무서운 요즘 읽기에 취미를 들이고 싶은 직장인이라면 이런 책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케이도 준의 <일곱개의 회의>. 첫 만남은 비록 아쉬움의 연속이었지만, 영 안 보고 살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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