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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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절미하고 재밌다. 쉽고 담백한 문장이 큰 고민없이 종이 위를 달려나간다. 읽기가 어려워진 세대를 위한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렇게 써야 힘들이지 않고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구나. 재미로만 따진다면야 근래에 본 소설 중 가장 훌륭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퇴마사 안은영의 이야기다. 죽은 것들을 보는 재능이 있어 어릴때부터 고초를 겪었다. 왕따였고, 항상 주변부에 머물렀는데, 남을 위해 열심히 희생해도 정작 본인은 외면받는 괴물이 되어 쓸쓸하게 살아가야 하는 아이러니가 은영의 캐릭터를 중층으로 쌓아올린다. 자신의 일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학교 주변에 악귀가 나타나면 맨발로 달려나가 비비탄 총과 무지개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무거운 운명을 짊어진 츤데레의 전형을 보여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위처'를 떠올리면 얼추 비슷한 냄새가 날 것이다.


청춘남녀가 모인 학교인 만큼 로맨스도 빠지지 않는다. 학생 사이에도, 교사 사이에도. 보건교사 안은영의 파트너는 재단 설립자의 손자인 한문 선생 홍인표. 학창시절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다리 한쪽이 짧다. 튼튼한 두 다리를 똑바로 딛고 서도 힘든 세상인데 모자란 다리는 오죽했겠는가? 결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미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게다가 인표의 단전에는 할아버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사랑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어 은영의 살아있는 방패가 되어준다. 그녀는 인표의 단전에서 에너지를 충전해 악귀들을 물리친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동안 사랑의 에너지가 인표에게서 은영으로 흘러들어간다.


툭툭 던지듯 내뱉는 대사, 무뚝뚝한 문장들 사이로 불쑥 치고 들어오는 달달한 이야기가 연인과 친구 사이의 썸 관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역시 감정은 리듬이다. 설탕 범벅 도너츠는 아무리 먹어도 달지가 않다. 쓰디 쓴 에스프레소 한 잔, 그 밑에 녹지 않은 각설탕 조각이 입 안에 흘러들어올 때의 느낌으로 이야기를 엮어야 한다.


오컬트를 깊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훌륭한 퇴마 소설을 썼다는 것도 놀랍다. 중세니 주술이니 피라미드, 온갖 비의와 신비주의에 이골이 난 매니아들에겐 유치한 애들 장난으로 보이겠지만 그게 이 소설의 매력이다. 어설픈 시도를 하느니 아예 자기만의 길을 간다. 이 소설이 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만들어지는 지 알 것 같다. 정유미의 안은영, 남주혁의 홍인표는 아무리 봐도 미스 캐스팅 같지만. 원작이 가진 상쾌함을 믿어본다. 오랜만에 기대가 되는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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