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의 에세이는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읽는다. 그의 에세이는 책장이 아무리 두꺼워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쓰는 사람에게도, 읽는 사람에게도 일종의 해방구라고 생각한다.


많이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키 에세이들은 대개 비슷한 내용들을 공유한다.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경우도 많고, 애초에 삶 자체가 단순하기 짝이 없어 역동적 이야기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여행을 자주 떠나긴 하지만 들뜬 마음으로 감상을 전하는 법은 없다. 끓어오르는 피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고 하나의 객체가 되어 그 자리에 스며든 것 같은 하루키가 차분한 어조로 감흥을 전달한다. 그게 바로 하루키가 세상을 대하는 기본적 태도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선 다소 심심할 수 있다. 여기서 호불호가 많이 나뉘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에세이가 이전 작들의 단순한 복제품인 것은 아니다. 가장 큰 특징은 하루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눈 시간들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내가 그리는 하루키는 아무도 찾지 않는 언덕의 고장난 등대 같은 존재라 그가 지인들과 어울려 다니며 이런저런 소동을 피우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도 그렇게 한다. 화려한 클럽에서 자신의 작품을 비판하며 시비를 거는 취객과 패싸움을 벌인다든가 만취하여 플로어 위를 기어다니는 것 같은 소동은 아니지만 하루키도 그냥 보통의 아저씨네, 하는 장면이 많다. 물론 이 에세이를 집필한 시간대가 너무 옛날이라(90년대 쯤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이와 똑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1949년 생인 하루키는 올해로 벌써 70세가 됐다. 그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넘어가면 된다. 몇몇 장면에선 성인지감수성이 매우 떨어지는 아저씨들의 농담이 등장하기도 하니 그에게 조금이라도 실망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패스하기 바란다.


하지만 <장수 고양이의 비밀>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고양이 얘기가 나온다는 점이다. 고양이 애호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가 키웠던 고양이 '뮤즈'에 대한 얘기는 처음 들어본다. 게다가 이 고양이는 하루키만큼이나 특이한 동물이라 마치 소설같은 장면을 연출해 낸다. 아직 작가로 데뷔하기 전, 재즈바의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와 지친 몸을 이끌고 임신한 고양이와 새벽녘에 나눴던 시간의 기억을 돌아보면 두 동물 사이를 잇는 확실한 뭔가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이방인이자 외톨이로 살 것 같은 하루키에게도 온 힘을 다해 의지를 주고 받는 생명체가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한다. 사실 이 인간, 츤데레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인생의 큰 환란 앞에서도 "이거 참 큰일인데." 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할 것 같은 하루키가 그 털 많은 동물과 어떤 시간을 공유했는지 알고 싶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소설에선 거의 볼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촌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는 순수한 감동의 열기마저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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