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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홀 The Hole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평점 :
<홀>은 구멍의 깊이만큼 어둡고 축축한 소설이다. 이야기는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로 흘러간다. 주인공 부부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부인은 죽고 남편은 전신마비에 이른다. 꼼짝도 못하는 사위를 장모가 보살피기 시작하는데, 그녀는 우연히 죽은 딸의 일기를 보게되고 사위에 대한 태도가 차갑게 변한다.
일기에 뭐가 적혀있었던 걸까?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턱 관절이 부러져 말도 못하는 '나'는 삶의 전부를 장모에게 맡긴 채 살아가야만 한다. 끈질긴 재활 끝에 겨우 왼팔 하나를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병문안을 온 사람들에게 전하는 '나'의 메모는 오해와 무관심 속에서 번번히 물거품이 되고만다.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장모가 마당에 커다란 구멍을 파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나'는 장모가 연못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그 구멍은 연못으로 쓰일 것이다. 그 구멍은 연못으로 쓰일 것이다. 그 구멍은 연못으로 쓰일 것이다.
이야기가 과거에서 현재로 흘렀다면 <홀>은 따분한 인과응보의 소설이 됐겠지만 그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축축한 긴장을 흡수한다. 많이도 아니다. 책장을 넘길때마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서스펜스에 서서히 중독된다. 소재면에선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야기 면에선 아예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 <홀>이 훨씬 더 절망적이다. 이 소설은 희망고문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절망시키는지를. '나'는 등 뒤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물의 냉기를 느끼면서도 몸을 일으키기는 커녕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작가는 애초에 '나'를 구해줄 마음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무서운 건 장모가 아니다. 작가다.
익숙한 일상에서 미지와 공포, 긴장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선 편혜영을 따라올 자가 없는 것 같다. 그녀는 요란한 사건을 만들지 않고도, 피와 시체를 빼고도 털을 쭈뼛 세우는 어둠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어둠은 단단히 응축된 구체처럼 눈에 띄는 게 아니라 뿌연 안개처럼 온 세상을 뒤덮는다. 어느샌가 안개의 한복판에 들어와 길을 잃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