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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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어리 소년이 벵갈 호랑이와 작은 구명보트를 나눠 타고 300일 넘게 태평양을 표류한 조난기는 이 책보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로 더 유명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그 영화를 보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그랬다면 전율하는 마지막을 보지 못한 채 지루한 조난기를 덮어버렸을 것이다. <파이 이야기>는 마지막 수십 페이지가 계시처럼 내리꽂히는 작품이다. 그 압도적 충격을 그대로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지 말것을 당부한다.


<파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진실이 존재한다. 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아니라 두 가지 '진실'이라고 썼다. 그 이유를 상세히 논하는 건 이 글의 역량을 한참이나 벗어나는 일이다. 다만 나는 이야기라는 단어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허구'라는 편견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싶다. 세상은 수 많은 이야기의 집합에 불과하고 사람들은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한 뒤 그것을 사실로, 나아가 진실로 규정하면서도 그게 이야기였다는 사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진실이란 결국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규정될 따름이다. 이 말은 허구든 사실이든 모두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열한 조난기는 정확히 이 과정, 이야기가 탄생하고 사람들의 선택을 받고 그들의 삶에 흡수되는, 인생의 구성 원리를 이야기한다.


가까스로 구조된 파이는 그를 찾아온 조사관들에게 두 가지의 진실을 들려준다. 하나는 파이가 다리를 다친 얼룩말과 암컷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리처드 파커라는 벵갈 호랑이와 함께 태평양을 표류한 이야기다. 하이에나는 다리를 다친 얼룩말을 잡아먹었고 그 행위에 분노해 싸움을 걸어온 암컷 오랑우탄까지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 사악한 짐승도 결국 리처드 파커에게 물려 죽고 만다. 파이는 마지막 남은 짐승과 함께 태평양을 표류하다 멕시코에서 구조된다.


자, 이제 잔혹한 진실을 들어보자. 파이가 말한 암컷 오랑우탄은 사실 그의 어머니였고 하이에나는 가라앉은 배의 프랑스인 요리사였다. 얼룩말은 다리를 다친 선원, 리차드 파커는 파이의 내면에 도사린 분노. 프랑스인 요리사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선원이 죽을거라며 그의 다리를 잘라버린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선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리를 먹는 것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엄마는 요리사의 비윤리에 분노하며 한사코 그 고기를 거부하지만 파이는 엄마 몰래 인육을 받아먹으며 조난을 버틴다. 결국 그 사실이 밝혀지며 엄마와 요리사는 심하게 다툰다. 요리사는 거칠게 항의하는 엄마를 죽여 바다 밑으로 떠밀어버린다. 파이의 귀에 엄마의 비명과 그녀가 바다 속에 빠지며 내는 물소리가 들린다. 파이는 귀를 막고 현실에서 도피한다. 후에도 파이와 요리사는 한참을 같이 있었지만 마침내 나타난 리차드 파커가 요리사를 살해하고 그의 위 속에 든 음식물을 발라먹는다.


파이 이야기의 진실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소설은 열린 결말을 지향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안정시켜줄 마지막 문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 먼저 '진실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진실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복무하는 시종일까? 그렇다면 역시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파이의 거짓말은 파이의 삶을 지켜줬고 그에게 미래를 선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을 사실과 동일시하는 사람이라면 비극을 이겨내지 못하고 환상으로 도피한 파이의 나약함에 구토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후자의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는 아무리 단호하고 끔찍해도 언제나 사실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치밀어오는 안도를 막을 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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