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피뢰침
헬렌 디윗 지음, 김지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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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일상화되어 있어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 불붙기 시작한 여성의 목소리에 많은 남성들이 분노를 표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일상화된 차별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차별 철폐를 '여성 우대'로 착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대우를 집어치우라며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미국의 여성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성에게 특혜를 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치워달라는 것 뿐입니다."


코넬대 정치학 학사에 컬럼비아 대학 로스쿨을 공동 수석으로 졸업한 긴즈버그에게도 차별은 일상이었다. 로펌은 그녀보다 성적이 낮은 남학생을 스카우트했고 판사가 된 이후에도 그녀는 재판연구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차별은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행해진다. 무서운건 이 차별이 많은 경우 성적 착취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모 항공사 회장이 자사의 여자 승무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유력 정치인이 자신의 비서를 어떻게 '길들였는지'를 보고 있으면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이 비단 차별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직장에서 벌어지는 수 많은 성추행 및 폭행 사건들은 그 충격이 더하다. 이 사회에서 가장 공적으로 여겨지는 곳에서조차 여성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면 그들의 안식처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남성과 동일한 능력을 지녔음을 증명했고, 그들과 똑같은 일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 동안 수행하고 있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남자들이 여성의 권리를 여전히 자신의 호의로 여기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내가 너희를 허락했기 때문에 너희가 여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의 목은 내 말 한마디에 달려있다. 끈질기게 수청을 들라 강요하는 변사또의 폭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피뢰침>은 이러한 여성의 위기를 극단까지 몰고 간다. 블랙코미디 치고는 농담의 센스가 떨어지고 좀 지루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문제를 바닥까지 끌고 들어가는 뚝심만큼은 인정해줄만 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사내 성추행 문제가 남자들이 적당한 때에, 충분한 만큼 성적 욕구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내 섹스 서비스'를 제안한다. 욕구를 느끼는 남성이 인트라넷에 접속해 신청을 하면 회사에 재직 중인 여성 한 명이 특수 제작된 화장실로 이동해 치마를 벗고 대기한다. 그러면 곧 신청한 남자가 들어와... 물론 여성의 신분은 철저한 비밀이 보장되며 주인공의 회사는 이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노하우를 앞세워 시장을 지배한다.


소설 속에서 섹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들에겐 애초에 그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얻지 못할 고소득이 보장된다. 몇몇 여성들은 이렇게 번 돈으로 로스쿨에 입학하여 성공한 법조인이 되기도 한다. 이 성공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적 착취를 정당화하는 구실이고, 이를 통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는 되지만 읽는 순간 역겨운 감정이 드는 걸 막을 수는 없다.


<피뢰침>은 너무 적나라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일상화된 폭력, 그 은은하고 투명한, 그러나 명백히 존재하는 구조의 윤곽을 드러냄으로써 보는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야 하는데, 행위 자체가 너무 추잡하고 자극적이다보니 그거 밖에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다. 차라리 단편이었으면 훨씬 좋았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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