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 사회에 '전문가'라는 종족이 출현한 이래 그들이 가장 몰두해온 일은 자신의 일에 성벽을 치는 것이었다. 의학, 법학, 경제학, 회계학 등등 이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전문 분야의 공통점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시스템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문 용어를 예로 들어볼까? 그것의 목표는 해당 분야를 효율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사실 이 체계의 가장 큰 기능은 비전문가가 전문가의 말을 못 알아듣게 하려는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읽고 쓰는 능력을 독점'하는 건 언제나 특권층의 지배 전략이었다. 이 말이 지나친 비약으로 느껴진다면 조선의 사대부들이 왜 그렇게 훈민정음을 미워했는지 떠올려보자. 그들은 심지어 대왕의 업적을 '언문'이라 칭하며 깔보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벽이 필요한 걸까?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자신이 매기는 높은 서비스 요금을 정당화하기 위해 실제보다 일이 더 어렵게 보이도록 할 인센티브가 있기 때문이다(20p. 전자책 기준). 법전과 회계장부를 해석하는 일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도 그들에게 그렇게 높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일이 복잡해질 수록 보통 사람들의 관심은 멀어지고 전문가에 대한 의존이 높아진다. 서비스 제공자가 유일한 경우 경제학은 이를 '독점'이라고 부른다. 독점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가? 바로 가격 결정권이 수요자가 아닌 제공자에게 있다는 것.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장하준의 말에 따르면 경제학의 95%는 상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학문이 태동한 이래 수많은 종사자들이 전문용어와 수학을 동원해 경제학을 들개도 물고가지 않을정도의 끔찍한 흉물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는 세상 온갖 것들에 우리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다. 정치 전문가가 아니어도 우리는 트럼프와 김정은의 행동에 깔린 정치적 의도를 해석한다. 인권은 어떤가? 근로법은? 동성결혼은? 기후 문제는? 심지어 우리는 역사상 가장 난해한 인공지능 기술에 대해서도 그 미래를 손쉽게 결론내린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이 낳은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는지 떠올려보자).


장하준은 우리가 경제학에 대해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의 전작과 다르게 무엇이 틀렸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존재하는지, 무엇이 가능한지를 최대한 폭넓게 소개하려 노력한다. 이것은 경제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특정 이론에 치우치지 않은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경제학이 결코 가치 중립적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경제학에는 1개의 답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 내리는 모든 경제학적 결정에는 가치판단이 따른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특정 기준, 특정 상황에 따라 바뀐다는 말이다. 이전 시대, 어떤 지역에서는 맞는 것으로 드러난 판단이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는 완전한 재앙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싸움을 멈추고 완전히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이 상황, 이 시대에는 무엇이 가장 적합할까? 라는 질문을 말이다.


특정 이론과 사상에 경도된 사람들에게는 한가지만 맞고 다른 수십 가지의 가능성은 모두 틀린 것이 된다. 그들이 맞다면 한번 성공을 경험한 국가의 경제는 영원토록 번성을 구가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를 본적이 있는가? 세상 모든 국가의 경제는 흥망성쇠를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이유가 뭐겠는가? 변화는 다른 변화를 부르고 변화했다는 그 자체가 바로 변화의 요인이 되는 게 인간의 삶, 즉 경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딱 한 장의 카드만 손에 들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스페이드 에이스라도 절대 포커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최대한 많은 패를 들고 있어야 한다. 그 패를 이리저리 쪼아가며 상황에 맞게 버리고 되가져오기를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좋은건 역시 덱으로부터 가능한 많은 패를 드로우(Draw)하는 것이다. 가능한 많은 패를 뽑아오는 것. 그게 바로 이 책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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