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소설의 계보학 -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남성인가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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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의 계보학>은 해부의 첫 대상으로 뉴게이트 범죄 소설을 다루는데 이 소설들은 당시 영국 정부가 발행하던 범죄자들의 전기물인 뉴게이트 캘린더에서 주인공을 가져왔다. 뉴게이트 캘린더는 정부가 시민을 교화하기 위해 만든 책이었다. 흉악한 범죄자들의 생애과 그들의 처참한 최후를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잠재적 범죄자들의 싹을 자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뉴게이트 소설또한 그러한 의도를 품고 기획된 걸까? 전혀. 여기가 바로 뉴게이트 소설의 진가가 발휘되는 지점이다.


뉴게이트 소설은 뉴게이트 캘린더와는 달리 범죄자를 영웅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 소설들은 대중의 폭발적인 지지 얻었다. 왜일까? 왜 범죄자들은 영웅이 되었고 영웅이 된 범죄자들은 사랑을 받은걸까? 뉴게이트 소설은 단순히 일탈의 욕구를 충족시킨 게 아니었다. 그 서사에는 당시의 대중들이 폭넓게 공감할 수 있는 뭔가가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이 발흥한 19세기의 영국으로 돌아가보자. 산업혁명 이후로 자본주의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그 시발점이자 씨앗이었던 영국은 그 누구보다도 찬란한 업적을 이뤄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폭발적 성장은 누군가의 희생이 전제되는 법이다. 산업자본을 이룬 부자들은 끝없는 호사를 누렸고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은 강도 높은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려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들은 국가와 법이 시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자와 체제, 즉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누구를 위하여 법은 존재하는가? 누구를 위하여 정부는 존재하는가? 따라서 법을 무시하고 잠시나마 체제를 농락한 범죄자들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뉴게이트 소설은 바로 그 전복성으로 인해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만다. 지배자들은 무식한 하층민들이 체제의 허점을 발견하고 불만을 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까 두려웠다. 잡초는 밟아야 한다. 그래도 일어선다면, 불을 질러 새카맣게 태우는 것이다.


이 세계의 좌측 끝에 뉴게이트 소설이 있다면 오른쪽 끝에 서 있는 게 바로 추리소설이다. 뉴게이트 소설과는 달리 추리소설은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이어올 뿐만 아니라 엄청난 인기까지 동반한다. 왜일까? 그것은 추리소설이 가진 보수성 때문이다.


탐정은 왜 항상 귀족적인 백인 남성인가? 그들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 탐정에게 범죄 수사는 취미이자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놀이일 뿐이다. 범죄자가 무질서를 의미한다면 탐정은 질서를 의미한다. 백인에 귀족 그리고 질서. 추리소설에서 범죄자가 탐정을 이기는 경우를 본 적 있는가?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지능을 가진 탐정은 더럽고 추악하고 교활한, 법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범죄자를 완벽하게 제압한다. 추리소설의 발흥기에 범죄자로 묘사된 사람들은 당시 유럽의 선진국으로 몰려들던 외국인이었다. 가난하고 천한자들이 우리의 세계(그들의 세계)를 파괴할지 모른다는 공포. 탐정은 무지한 사람들의 범죄 행위로부터 체제를 지키는 파수꾼이었던 것이다.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나지 않는가?


하지만 추리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탐정이 서사를 독점하는 데 있다. 내가 추리소설을 싫어하는 이유는 탐정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탐정을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오로지 탐정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탐정에게만 힌트를 제공한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 장에 이르러 탐정이 풀어내는 사건의 전말을 들은 뒤 탁, 하고 무릎을 치는 것 뿐이다.


독자는 위대한 영도자의 지도를 따라야만한다. 생각하는 것은 금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금지. 이러한 태도가 내면화된 시민들은 실세계에서도 소극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스스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라는 자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자기들을 이끌어줄 구세주만을 바라는 것. 오늘날 선거는 유명한 탐정을 찾아 사건을 의뢰하는 것과 닮아있다. 모쪼록 현명하게 나라를 잘 "이끌어주길"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도 나라를 구원할 명탐정을 찾아헤맨다.


이러한 추리소설의 보수성은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태동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의해 어느 정도 변화를 겪지만 오늘날까지도 전통 추리소설에 비해 하드보일드 장르는 싸구려 B급 감성으로 매도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몰이해를 고려하더라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저자의 말대로 진짜 전복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 장르에 대한 개인적 애착때문인지 저자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면이 있다.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에는 대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팜므파탈이 등장하고 결국 파멸하는데, 나에겐 이 구조가 실제 체제에는 반항할 용기가 없는 남성이 자기보다 약한 여자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와 외국인들이 내 직장을 뺏어갔다고 울분을 토하는 러스티 벨트의 백인 제조업 노동자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설령 이 장르가 그런 사람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반성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에 대해선 여전히 물음표가 떠오른다. 싸구려 펄프 매거진에 찍혀 나오는 싸구려 소설. 남자들은 자신의 분신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으며 반성을 하기보단 대리만족을 느끼지 않았을까? 탐정이 팜므파탈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순간 그들이 느낀 희열이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범죄소설의 계보학>은 책 전체에 걸쳐 다소 같은 말이 반복되는 면이 있고 너무 많은 발췌본이 등장하여(특성상 그럴 수 밖에 없는 점은 이해한다) 흐름을 끊는 면이 있지만 해당 장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만한 요소가 충분하다. 우리가 익숙하게 접해왔던 이야기들에,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던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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