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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거대한 불평등 :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7월
평점 :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에 관한 담론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교보샘의 샘통북통 패키지를 통해 먼저 [불평등의 대가]를 접하고 이어서 읽어줬다. 총 600페이지에 달하는 벽돌책 스타일이지만 내용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완독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편이다.
이 책은 10여년 동안 스티글리츠 교수가 뉴욕 타임스, 배니티 페어, 신디케이트 프로젝트 등에 불평등을 주제로 발표한 칼럼들을 모아서 펴냈다. 저자는 글을 통해 오늘날의 이른바 1퍼센트를 위한 자본주의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거짓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인지, 나아가 이런 짝퉁 자본주의를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로 되돌리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정통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논의한다.
소개글을 통해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을 살펴보자면,
스티글리츠는 줄곧 불평등은 도덕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해 왔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원은 국민인데, 불평등은 이러한 소중한 인적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교육, 기간 시설, 테크놀로지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인적 자원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이러한 국가의 의무를 등한시했다. 부유층의 부가 늘어나면 중간 소득층과 저소득층의 형편도 곧 나아질 거라는 낙수 효과 경제학에 인지 포획된 정부들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현재의 고통을 인내할 것을 요구해 왔다. 세계화와 자유 무역 협정,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시장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면, 세계는 더 풍요로워지고 장기적으로 그 혜택을 모두가 공유하게 될 거라는 주장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도 그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목격하는 것은 소수 부유층과 대다수 나머지를 가르는 거대한 균열이다. 금융 위기 이후에 미국에서 상위 1퍼센트가 새로 창출되는 부를 거의 독식하는 사이 중간 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소득은 정체하거나 줄어들었고, 2016년 불과 8명의 세계 최고 갑부들이 전 세계 하위 50퍼센트 인구가 가진 부와 맞먹는 부를 일구어 냈다.
스티글리츠는 전작 불평등의 대가에서 했던 논의의 핵심을 이 책에서 거듭 재확인하고 확장한다. 그는 통화 정책보다 재정 정책이, 긴축 정책보다 적극적인 재정 지출 정책이, 공급 중심 정책보다 수요 중심 정책이, 부유층을 보호하는 정책보다 중간 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를 돕는 정책이 경제를 성장시키고 모두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역설한다.
중간 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소득 대비 지출 비율이 부유층의 소득 대비 지출 비율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중간 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소득이 증대되면 수요가 늘어나고, 이는 경기 침체의 해소와 경제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시 경제적 분석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불평등을 해소해야 할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소수를 위해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는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상황은 여전히 심각하다. 경제 불평등이 정치 불평등을 낳고, 정치 불평등이 다시 경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악순환은 멈추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환멸감도 깊다. 오늘날의 거대한 불평등을 빚어낸 주요 원천 가운데 하나는 정치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벗어날 기회 역시 정치에 있다.
스티글리츠는, 극소수의 부자들이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걸 조장하고 강화하는 짝퉁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대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여전히 우리에게 열려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사회에 거대한 균열을 가져온 불평등은 불공평한 정책들과 잘못된 우선순위가 누적되어 나타난 결과물일 뿐, 절대 경제의 근본적인 법칙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정치가 중요하다.
불평등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있다
불평등에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건강 측면에서도, 교육 접근성 측면에서도, 정치적 자유 측면에서도, 신변 안전의 측면에서도 불평등이 있다. 여성 차별과 아동기 박탈의 문제도 있다. 그러나 부와 소득의 불평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기회의 불평등 문제이다. 불평등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동기 박탈과 교육 및 의료의 불평등은 결국 기회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소득의 불평등이 심각한 나라들에서는 기회의 불평등 역시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기회의 불평등을 낳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교육 기회의 불평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을 낳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고등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이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스티글리츠가 보고하는 미국의 대학 등록금 문제는 심각하다. 스티글리츠는 2008년 경제 위기 이전에도 미국의 교육 불평등 문제가 심각했지만, 위기 이후에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고 말한다.
주 정부들이 교육 지원금을 축소하는 가운데 대학들은 등록금을 인상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주택 구입에 과도한 빚을 내는 현상이 벌어졌던 것처럼, 요즘 미국의 젊은이들은 교육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과도한 빚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미국의 학자금 채무 규모는 1조 달러를 넘어서 신용 카드 채무 총액보다 많아졌고, 대학생들의 평균 학자금 채무는 약 3만 달러에 이른다. 기회의 땅 미국은 이제 신화가 되었고, 아메리칸드림은 악몽이 되었다.
이런 추세는 거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은 빚을 갚기 위해 연애와 결혼, 출산을 미루고, 자동차와 주택 구입도 미루게 될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젊은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다르지 않다. 젊은이들은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고등 교육을 받지 않으면 장래가 어둡고, 고등 교육을 받으면 빚더미에 앉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는 이렇게 한탄한다. <오늘날의 교육 시스템은 돈이 있어야만 참여할 수 있는 승자 독식의 게임, 최상층은 확고한 입지를 제공받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거액의 채무를 끌어안은 채 성공이 보장되지 않은 모험에 뛰어들어야 하는 게임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짝퉁 자본주의다
스티글리츠가 보기에, 오늘날의 극단화된 불평등은 자본주의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왜곡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이른바 짝퉁 자본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스티글리츠가 금융 위기 당시 미국 정부가 은행들에 수천억 달러의 구제 자금을 투입한 일에 대해 <부유층을 위한 미국식 사회주의>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개탄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미국 정부가 집을 잃은 수백만 주택 소유자들은 길거리에 방치한 채, 전 세계를 경제 침체에 빠뜨린 주범들인 은행가들을 처벌하기는커녕 그들과 투자자들이 입은 손실까지 메워 주는 것은 그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티글리츠는 늘 시장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고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위선을 공격한다. 부유층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이런 자본주의는 진짜 자본주의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면, 시장에서 실패한 자들은 스스로의 잘못에 책임을 지고 도태되는 게 맞다.
그러나 1퍼센트를 위한 정부는 평범한 개인들이 파산에 이르는 것은 무책임하게 방치하면서, 덩치가 큰 기업과 부유층은 파산으로부터 적극 보호해 왔다. 상황이 이렇다면 은행들이 위험천만한 도박에 뛰어들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게임에서 이기면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고, 설사 게임에서 지더라도 뒷감당은 정부가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공정한 기업 복지 정책은 납세자들에게 막대한 재정 부담을 떠안긴다. 그러나 스티글리츠가 보기에,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바로 세계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안긴 주역들에게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시장 경제의 규칙이 바뀐다는 것이다. 금융 위기 당시 은행들은 대출 재개를 돕기 위해 금융 부분에 투입된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보너스와 배당금을 지급하는 데 썼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은 제대로 사회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필요할 때마다 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흥청망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다수 국민들이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티글리츠가 불평등의 심화에 기여한다고 보는 또 하나의 중대한 요인은 불공정한 세금 제도다. 스티글리츠는 투기꾼들에게 부과되는 세율이 생계를 위해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세율보다 훨씬 낮은 현실을 지적하며, 지금 미국의 세금 제도는 99퍼센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는 상위 1퍼센트의 실효 세율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미국의 최고 한계 세율은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94퍼센트로 정점을 찍은 다음 1960년대와 1970대에 70퍼센트를 유지하다가, 현재는 39.6퍼센트에 불과한데, 실효 세율은 이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인 2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수많은 특혜 조항들 때문이다. 더하여 스티글리츠는 부자들에게 막대한 이득을 안기는 자본 이득 세율이 왜 20퍼센트밖에 안 되는 건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말한다.
이처럼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세금 제도는 경제 구조 또한 왜곡한다. 투기 거래에 대한 세금이 낮으면 투기 거래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고, 국가의 미래를 이끌 뛰어난 인재들이 실물 분야가 아니라 투기판이 된 금융계로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지대 추구 행위에 막대한 이익을 보장해 주는 경제가 정상적으로 굴러갈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부시가 추진한 부자 감세 조치는 경기를 부양하기보다는 부자들의 지대 추구 행위를 조장했고, 지대 추구 사업이 번창하면서 오히려 경제 성장률은 떨어지고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교육과 기간 시설, 테크놀로지에 대한 투자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금 제도가 이처럼 왜곡될 때, 경제와 불평등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더하여 국민의 연대감과 결속력 또한 현저히 낮아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대다수 국민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그러한 정부를 불신하고 민주주의에 환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스티글리츠의 말대로, 불평등이 고착화된 국가에서 경제와 정치는 악순환의 구조에 갇히고 만다.
세계화는 거의 예외 없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스티글리츠에 따르면, 세계화는 성장의 가속화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지만 거의 예외 없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세계화는 대체로 부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조세 피난처를 통해 조세를 회피하고, 더 낮은 임금을 찾아 공장을 이전하고, 이를 통해 자국 노동자들이 더 낮은 임금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임금과 세금이 더 낮은 곳을 찾아 흘러들어 가고, 국가들과 노동자들은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기준 인하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세계화를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노동자들이 고용 보호와 공공 서비스의 감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 시대에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이런 고통은 당연히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사실상 노동자들이 세계화로 인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티글리츠는 사태의 핵심을 송곳처럼 찌른다. 세계화가 국가에 <전반적으로> 이득이 되는데, 노동자들이 <전반적으로> 더 곤궁해진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화로 인한 혜택이 전부 부유층과 기업 소유주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을 원한다면 좌파를 지지하라
스티글리츠는 2008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성장을 원한다면 좌파를 지지하라라는 글을 발표한다. 성장을 위해 좌파를 지지하라니. 성장에 목을 매는 것은 대체로 우파 아니었던가.
스티글리츠에 따르면, 좌파와 우파의 성장 전략에는 큰 차이가 있다. 첫째, 성장은 단순히 국민 소득의 증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장은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국민 대다수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포용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둘째, 정부의 역할에 대한 시각이다. 좌파는 기반 시설과 교육의 제공, 테크놀로지의 개발, 심지어 기업가의 역할까지 담당하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본다. 스티글리츠는 미국에서 인터넷과 현대 생명 공학 혁명의 기반을 구축한 것도, 19세기에 농업 혁명의 기반을 마련한 것도 모두 정부였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다.
마지막 주장은 역설적이다. 요즘 시장의 본질을 이해하고, 시장이 경제에서 담당할 수 있고, 담당해야 하는 역할을 더 잘 이해하는 쪽은 우파가 아니라 좌파라는 것이다. 반면 확고한 집행력을 이용해 기득권 집단을 강력히 옹호하며 강력한 국가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우파는 자유 시장주의자라기보다는 국가 조합주의자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스티글리츠는 시장은 <장기적으로> 효율을 달성하고 완전 고용을 이룰 것이기 때문에 정부 개입이 필요치 않다는 시장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일축한다. 케인스의 말마따나,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다. 현재 대선의 열기가 뜨거운 한국에서도 놀라운 데자뷔 현상을 느낄 수 있었다. 왜 보수가 아니라 진보를 지지해야되는가에 대해 정통 경제학자의 시선으로 살펴볼 수 있다. 아무튼 정치가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마무리글에서 저자의 시각을 통해 오늘날의 불평등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보는걸로 글을 마무리한다
"미국은 건국 이후로 줄곧 불평등 문제를 겪어 왔습니다. 하지만 전후시기에 구축된 세금 정책과 규제 조치 덕분에 부분적으로나마 불평등을개선해 나가는 올바른 경로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이건 집권기에시작된 세금 인하와 규제 완화는 이런 추세를 역전시켰습니다.다. 오늘날세금과 이전 지출(식비 지원을 비롯한 저소득층 지원금)을 반영하기 전의소득 격차는 예전보다 확대되었는데, 여기에 더하여 부유층에 대한 정부지원이 늘어나고 저소득층에 대한 정부 지원이 줄어든 결과, 세금과 이전지출을 반영해 소득 격차는 훨씬 커졌습니다.
나는 낙수 효과 경제 이론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수요가존재하면(또한 자본 접근성과 기간 시설 등 다양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면, 세계 전역에서는 독창성이 넘쳐나고 진취적인 기업 활동이 융성한다. 이런관점에서, 진정한 고용 창출자는 소비자다. 미국과 유럽 경제가 고용을창출하지 못하는 이유는 소득이 정체되어 수요 역시 정체되어 있기때문이다.
이 책을 쓰고 있는 지금,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는는 위기가시작되기 직전보다 낮은 임금 수준이 확인되고 있고, 앞에서 여러 번지적했듯이, 일반 미국인 가구의 소득은 25년 전보다 낮은 수준이다. 이런상황에서 수요 정체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한마디로, 우리가 쓸 수 있는 탄약은 바닥나지 않았다. 우리가 처한 곤경은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론과 경험은 우리 무기고에는 여전히 강력한무기들이 채워져 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는 우리가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제한한다.
하지만 이런 제약 속에서도 우리는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GDP 대비채무 비율의 축소를 충분히 이루어 낼 수 있다. 우리 경제의 번영을 복원하는 데 필수적인 정책들을 선택하느냐 못하느냐는 오로지 정치적인 문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