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 쿠데타로 임금을 확보하고 권신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만지원을 약속한 일본의 배신과 임금의 손절, 청군 개입까지!
조선 근대화를 꿈꾼 개화당의 앞날은?
●미국에 보빙사로 간 민영익과 홍영식이 따로따로 귀국한 이유는?
• 이홍장의 소개로 고종의 외교 고문이 된 뵐렌도르프는 어떤 행보를?
●개화당 주력 북청군을 이끈 윤웅렬이 정변 직전 북청으로 돌아간 까닭은?
•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어떤 속내로 개화당에 일본군 지원을 약속했을까?
• 베트남 북부에서 밀려난 청군은 어떻게 진남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83년 초대 주한 미국 공사 루셔스 H. 푸트가 전권 공사 자격으로 착임하자 조선은 그에 대한 답례로 민씨정권의 황태자 민영익을 정사로하여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한다. 이와 별개로, 계속되는 재정 위기를 벗어나고자 고종은 김옥균을 일본에 파견해 차관 도입을 추진하나 일본 정부는 조선의 차관 요구를 거절한다. 1884년 5월, 귀국한 김옥균은 정면의 최대 길림돌인 청나라가 청불전쟁으로혼란하고 일본 공사관이 무력 지원을 약속하자 12월 4일 갑신정변을 단행하고 신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개화당 쪽의 병력 부족, 원세개가 이끄는 청군의 빠른 개입, 믿었던 일본군의 철수 등으로 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다. 갑신정변 실패는 수구파의반동으로 이어졌고 대외적으로 조신에 대한 평판과 기대를 크게 하락시킨다. 한편 그해 8월, 프랑스가 통킹만에서 청나라 복건 함대를 섬멸하며 시작된 청불전쟁은 이듬해6월 청불신약을 통해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종주권을 재확인하며 끝난다.
조선 말기에 쇄국하지 않고 일찍 개항해 일본처럼 빠른 근대화를 이뤘다면 망국 식민지화의 비극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대체역사적 상상을 품어보지 않은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역사를 더 공부하다 보면 그 또한 부질없는 발버둥이었으리라 주억거리며 미련을떨치게 되지요. 중국, 인도, 베트남 등등의 나라들이 딱히 개항을 늦게 해서 제국주의 침략하놓이게 된 건 아니니까 말이죠." _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