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무시무시한 요귀가 유럽을 활보하고 있다" 라고 영역되었다. (반란의청사진이라기보다는 그림 형제의 동화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헬렌 맥팔레인의 최초 영어 번역 대신 새뮤얼 무어의 더 유명한 표현 ——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 이 자리잡게 된 것은 1888년에 이르러서이다. 맑스가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뒤였다.
10년간 영국의 사회주의 단체들은 혼수상태에 빠진 듯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펴게 된 것은 1860년대에이르러서였다.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지적했듯이, 이러한 각성은 "두전선에서 대단히 국제적인 ..... 정치활동과 현장 노동운동의 기묘한 결 합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것은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발생했고노동계급의 국제연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혁명가들은 어떤 사상을 특정 개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용어로 지칭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곤 했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무릇 혁명가들이라면 노동계급 전체의 대의에 부합하는 사상‘ 을 따라야지 ‘사람을 따라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특정 개인이 부각될 경우에는 운동의 원칙 자체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당시 혁명가들 사이에 널리 퍼진 공통된 생각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맑스주의자‘ 나 맑스주의‘ 라는 용이가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는 것이야말로 선언』에 담긴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얼마나 설득력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소련에서는 맑스와 엥겔스가 선언 에서 예견했던 "개인의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가 나타나지 않았다. 부르주아지가 타도되고 난 자리에는 겁에 질리고 우둔한 새로운 관료층, 즉 노멘클라투라라는 새로운 엘리트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말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해 지배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의 요청에도 대답하지 않는 전제적 정권의하수인이자 간부 관리자 계층이었다. 노멘클라투라는 공포를 통해 지배했지만, 자신들도 공포에 지배당했다. 소련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게 되는 나태와 무기력한 부패가 이때부터 자리를 잡은 것이다.
『선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출간된 책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성경, 과 『코란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부수가 인쇄된 책일 것이다. 실제로1917년 러시아혁명 전에도 35개국 언어로 544종이 출간된 상태였다. 게다가 맑스주의의 가장 대중적인 개설서라 할 수 있는 선언은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널리 판매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