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쿠라 사절단이 내전으로 혼란한 프랑스,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통치하는 독일등 서양 각국을 둘러보는 동안, 국내에 남은 사이고를 필두로 한 유수 정부는 사법 개혁, 학제 개혁, 종교 개혁 등 큼직큼직한 개혁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마침 동래부사의
"일본은 무법지국, 표현으로 정한론이 거세지는 와중에 사절단이 귀국, 정한을 감행할것인지 내치에 집중할 것인지를 놓고 정한파 세력(사이고 등)과 삿초 유사 세력(오쿠보등)이 충돌한다. 권력을 장악한 삿초 유사 세력은 사가의 난을 평정하고, 대만 출병을감행해 위세를 과시한다. 한편 조선에서는 고종이 반(反)대원군 세력을 규합해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친정을 시작하미, 일본에 전향적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일본은 국내적으로는 정한론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국외직으로는 열강의 반열에 들고자 조선에대한 물리적 압박을 계획, 운요호를 보니 초지진과 영종진을 공격한다. 이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수호조규 체결을 압박하는데…. 조선 쇄국의 빗장을 꺾은 강화도조약, 어떤 격동의 시대를 열어젖힐 것인가?
강화도조약은 오늘날 결과론적 시각에서 볼 때, 결국 일제강점에 이르게 되는 침략 플랜 큰 그림의 한 스텝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각은 결국 모든 그림이 완성된 이후에나 나오게 된 것. 당시 사람들의 관점은 오늘날 우리의 관점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_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