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어떤 주제는 언어로 찬양할 수 없는데, 압제가 그중 하나이다. 그 누구도 종교재판을 찬양하는 양서를 써내지 못했다. 시는전체주의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예술, 혹은건축 같은 반예술에는 심지어 압제가 이롭다고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산문 작가에게는 침묵과 죽음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알다시피 산문문학은 합리주의, 프로테스탄트의 시대, 자율적 개인의 산물이다. 그리고 지적 자유의 파괴는 언론인,
사회문제 저술가, 역사가, 소설가, 비평가, 시인을 순서대로 무력하게 만든다. 미래에는 개인적 감정이나 진실한 관찰과 관계없는 신종 문학이 태어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선 그런 것은 상상135

극이 있을 때는, 마치 오징어가 먹물을 뿜어내듯 본능적으로 긴단어와 낡아빠진 관용구에 의지하게 된다. 우리 시대에 ‘정치와거리두기‘ 같은 것은 없다. 모든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며, 정치는 본디 거짓말, 얼버무리기, 어리석음, 증오, 조현병을 한데 뭉쳐놓은 덩어리이다. (…) 우리는 작금의 정치적 혼란이 타락한언어와 관련이 있어서, 언어 쪽에서 시작하면 어느 정도 개선할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영어를 간결하게 사용하면, 정통적견해들에서 나오는 최악의 어리석음은 피할 수 있다. 아무리 필요해도 어떤 방언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리석은 말을 한다면 그 어리석음이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빤히 드러날 것이다.
(다소 차이는 있어도 보수주의부터 무정부주의까지 모든 정당에서)

(...) 지난 10년간 내가 가장 원한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를 위한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과성을 느끼는 것, 즉 불의를 지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글을 쓰려고 앉으면서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거야‘ 라고 다짐하지 않는다.
나는 폭로하고 싶은 거짓말, 주목받게 하고 싶은 사실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쓰고, 나의 첫 번째 관심사는 발언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는 심미적 경험이기도 한데, 만일 그렇지 않다.
면 책을 쓰는 건 고사하고 긴 잡지 기사를 쓰는 작업조차 할 수없을 것이다. 내 글을 주의 깊게 검토해본 이라면, 내 글이 철저한 프로파간다일 때조차 전업 정치인이라면 불필요하게 여길 부분을 꽤 담고 있음을 알 것이다. 나로서는 유년기에 확립된 세계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일기는 누구를 위해 쓰는거지? 미래를 위해서, 후세를 위해서. 그의 마음은 종이 위의 불확실한 날짜로 잠시 헤매다가, 이중사고 Doublethink 라는 신어와쿵하고 맞닥뜨렸다.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시도하고 있는지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어떻게 미래와 소통할 수 있는가?
본디 무리한 일이다. 미래가 현재와 비슷하다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다르다면 그가 처한 이 곤경은 무의미할 것이다.

은 어차피 곧 소멸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모두 당이 강요하는 거짓말을 인정한다면(만약 모든 기록이 똑같은 이야기를한다면), 그 거짓말은 역사로 기록되어 진실이 된다. 당 슬로건은 이렇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그러나 과거는 본디 바뀔 수 있는데도 바뀐 적이 없었다. 지금 진실한 것은 무엇이든 영원히 진실했고 영원히 진실할 것이다. 지극히 간단하다. 필요한 것은 오직 자기 기억을 끝없이 극복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를 "현실통제Reality control"라고 불렀다. 신어로는 "이중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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