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수행하는지 물어볼 수 있다. 최근에 나는 아들 아서(현재 열 살이며성가실 만큼 똑똑한 녀석)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삶의 목적에 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나이였다.
하지만 아서는 망설임 없이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질문에 즉각 대답했다. 마치 자기 나름대로 이미 계산을 마치고 정답을 도출해낸 것만 같았다. ‘깊은 생각과 굉장히 닮았는데 속도는 훨씬 더 빨랐다). "아빠, 삶의목적은 말이죠. 죽음이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자 아서는 이렇게 답했다. "무엇이든 결국에는 죽으니까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하지만 아빠, 죽음의 의미는 삶이에요. 죽음 없이는 삶도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한 이유는 주의를 흩뜨릴 만한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가운데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을 열린 마음으로 찾기 위해서였다. 나는 작가들이 철학이나 문학에 어떤 기여를했는지도 평가하지 않으려 애썼으며 이따금 일관성이 떨어지는 부분이나 염려스러운 함의가 담긴 부분만을 지적했을 뿐이다. 어떤 경우든 그들이 옳은지 혹은 ‘그른지‘를 판단하기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말해야만 했는지에 더 깊은 관심을 두었다. 사실 개인적으로궁극의 의문에 관해서라면 옳고 그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면 자기 존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금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 위해 주의를돌릴 만한 대상을 찾아 시간을 때우려고 애쓴다. 권태는 욕망하는상태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다. 권태는 손쉽게 우리를 절망에 이르게하며 심지어 목숨을 끊도록 만들기도 한다. 욕망이라는 고통과 권태라는 고통 사이에서 우리가 마랄 수 있는 최선은 뚜렷한 수준의 고통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매우 짧게나마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일시적인 고통의 유예를 가리켜 ‘행복‘이라 부른다. 결국 행복이란 잠깐이나마 고통이 상대적으로 부재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틀림없이 죽는다는사실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진정으로 우리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존재의 목적이 행복이 아닌 것은 매우 명백하다. 존재의 목적이 행복이었다면 세계는 지금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근본적인 판단의 오류일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더 많은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우리가 (필연적으로) 행복해지는 데 실패하고 나면 우리는 우리가 삶의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고 느끼게 되며 그만큼 더 불행해질 것이기때문이다.

군중에게서는 어떤 좋은 것도 나올 수 없다. 단일한 개인은 자기 발로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 윤리는 친절하게 구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모두(혹은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것과도 관련이 없다. 기독교신앙은 보통 양떼의 일부가 되고 그 속에서 안심을 갈구하는 식으로실천될 때가 많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아니며 우리가 모방해야 하는 기독교 신앙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모방하려고애써야 하는 기독교 신앙은 "영적인 사람의 고립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신약성서에 묘사된 기독교 신앙이다. "신약성서에서 기독교 신앙이란 자기 자신은 물론 아버지, 어머니, 자녀, 배우자등 다른 모든 사람, 즉 전 인류를 미워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고립감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신앙이다." 윤리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잠재적으로 온 세상에 맞선 채 홀로 (신과 함께) 서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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