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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 콜렉션 6종 (6disc) - 미치광이삐에로 + 네멋대로해라 + 사랑과경멸 + 여자는여자다 + 알파빌
장 뤽 고다르 감독 / 나무 / 2015년 4월
평점 :
2021년 3월 27일 토요일 DVD 평점 3점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인 장 뤽 고다르의 대표작이다. 중학생 시절 이 영화의 리메이크작인 리차드 기어 주연작 [브레드레스]를 상당히 인상적으로 감상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한참 디비디를 수집할때 [브레드레스]가 눈에 띄여 바로 구입했고, 원작에 해당하는 이 영화도 같이 영입했다. 하지만 디비디렉에 꼽아놓고 타이틀만 겉으로 보다가 생각이 나서 이제야 감상하게 됐다.
또 다른 누벨버그의 기수인 프랑수아 트뤼포는 ‘고다르 이전의 영화와 고다르 이후의 영화가 존재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분기점이 된 영화가 바로 [네 멋대로 해라]였고, 고전영화의 시대를 끝내고 영화가 더 이상 문학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는 강렬한 메세지를 던지며 영화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영화로 평가받는다.
먼저 영화의 시놉시스를 살펴보자면,
˝미셸 포와카르는 자동차나 훔치고 여자 지갑에나 손대는 좀도둑이다. 자신을 험프리 보가트에 투영하며 거울을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짓곤 한다. 마르세유에서 자동차를 훔친 그는 우발적으로 경찰을 쏴죽이고 지명 수배자가 된다. 그의 여자친구 패트리샤 프랜치니는 거리에서 신문을 팔고 있지만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미국에서 온 젊은 여성이다. 그녀의 아파트로 간 미셸은 함께 도망가자고 제안하지만, 패트리샤는 파리를 떠나기보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더 관심 있다.
점점 좁혀오는 경찰의 수사망 속에서 미셸은 도주를 꿈꾸지만, 패트리샤의 밀고로 결국 경찰의 총에 맞게 된다. 총을 맞고 비틀거리며 거리를 달려가는 미셸. 결국 바닥에 쓰러진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생을 마감한다. 패트리샤는 그를 보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지른다. 바로 미셸이 보가트를 흉내내며 즐겨 하던 그 동작이다.(세계영화 작품사전 발췌)˝
워낙 의미가 있는 영화인지라 공부차원에서 작품해설에 대해 읽어보자면,
˝첫 장편영화라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들 당시 장 뤽 고다르는 신인이라고 하기엔 꽤 깊은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10년 동안 영화를 공부하며 비평가로 활동했고, 이미 다섯편의 단편을 만든 경험이 있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시작은 프랑수아 트뤼포가 신문 기사를 읽고 만든 짤막한 트리트먼트였다. 1952년, 미셸 포르타유라는 남자는 몸이 아픈 엄마를 만나러 가기 위해 자동차를 훔쳤고, 그 과정에서 사고로 경찰을 죽이게 된다. 이 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트뤼포는 클로드 샤브롤과 함께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두 사람의 의견 충돌 때문에 시나리오로 완성되진 못하고 트리트먼트 상태에 머물고 말았다.
1959년 당시 고다르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조르주 드 보르가르라는 제작자에게 데뷔 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피에르 로티의 소설인 〈아이슬란드의 어부〉(Pêcheur d‘Islande)를 영화화하는 프로젝트였다. 고다르는 각색 과정에서 지루함을 느꼈고, 이때 접한 트뤼포의 트리트먼트를 드 보르가르에게 제안했다. 트뤼포와 샤브롤은 기꺼이 영화화를 승락했다. 이것은 영화 제작의 청신호였다. 당시 두 사람은 이미 스타 감독이 되어 있었기에, 제작비 마련에 분명 도움이 되었던 것. 이후 시나리오 작업은 고다르에 의해 이뤄졌고, 미셸이라는 캐릭터에 시나리오작가였던 폴 지고프의 이미지를 결합했다. 〈태양은 가득히〉(1960) 시나리오를 각색한 것으로 유명한 그는 당대의 바람둥이였다.
제작비는 9만달러로 저예산이었다. 그리고 남자 주연배우 장 폴 벨몽도는 당시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다. 고다르는 그럴듯한 여배우를 찾기 위해 친분이 있는 프랑수아 모레유 감독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미국 여배우 진 세버그의 남편이었고, 당시 세버그는 오토 프레민저 감독의 〈슬픔이여 안녕〉(1958)으로 막 떠오르고 있었다. 카메라는 당시 제작자와 계약 관계였던 사진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촬영감독 출신의 라울 쿠타르가 잡았다.
1959년 8월17일 시작된 촬영은 23일 동안 지속되었다. 현장은 즉흥적이었다. 고다르는 당일 오전에 현장에서 대사를 써서 배우에게 전달했고, 아주 간단한 리허설만 거친 뒤 곧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세 테이크 이상 간 적은 거의 없었다. 거리 촬영은 그 어느 곳에서도 사전 허락을 받지 않았고, 그 결과 생생한 느낌이 더했다.
촬영 시간도 매일 달랐다. 고다르에게 별 아이디어가 없는 날은 15분 만에 끝나기도 했고, 어떨 땐 12시간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이런 종잡을 수 없는 현장에 불만을 지닌 스태프들이 늘어나자, 제작자는 그들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사정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감독이었던 피에르 리시엥에 의하면 “촬영은 매우 조직적이었으며, 촬영 장소도 철저히 계획된 상태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 이미 고다르의 머릿속엔 거대한 틀이 있었고, 그 안에서 생생한 느낌을 만들어내기 위해 즉흥성을 발휘했던 것이다.
촬영은 시나리오 순서대로 이뤄졌고, 돌리(dolly : 카메라를 얹어 이동 촬영할 수 있도록 바퀴를 달아 만든 장치) 촬영이 필요할 땐 카메라를 든 쿠타르를 돌리 대신 휠체어에 태우고 고다르가 밀기도 했다. ‘누벨바그의 대부’로 일컬어지던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이 〈바다의 침묵〉(1949), 〈도박사 밥〉(1956)을 찍을 때 썼던 방법으로, 멜빌의 노하우를 고다르가 배운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59년 9월12일에 촬영은 끝났지만, 편집에 들어가자 업계에선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올해 최악의 영화’가 될 거라고 점치는 사람도 있었으며, 배우들도 영화가 흥행에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사회가 열리자 의외의 열광적인 반응이 쏟아졌고, 세계 영화사의 새로운 챕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2. 주제
〈네 멋대로 해라〉로 서른살에 첫 장편영화를 내놓은 고다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스로를 에세이 작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의 형태로 에세이를 쓰며 에세이의 형태로 소설을 쓴다.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글을 쓸 때처럼 나는 지금도 비평가이다. 그때는 글로 비평을 썼지만 지금은 영화로 쓴다는 것이 달라졌을 뿐이다.”
고다르에게 영화는 비평의 연장이었다. 그는 최초로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네 멋대로 해라〉는 관객이 ‘영화라는 프로세스’를 발견하게 되는, 혹은 영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영화였다. 즉 이 영화는 영화를 벌거벗기는 영화였다.
그러기에 〈네 멋대로 해라〉라는 텍스트를 이야기하면서 일반적인 의미의 주제 의식이나 철학 혹은 내포된 의미를 추출하려는 건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진지한 예술은 명백하게 의미 있는 테마를 다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네 멋대로 해라〉의 내러티브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할 것”이라는 조너선 바움백의 지적이 유효한 건, 이 영화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미셸 포와카르’라는 캐릭터가 지닌 철학적 테마는 있다. 제임스 모나코는 ‘누벨바그’의 다섯 감독에 대한 연구서 〈뉴 웨이브〉에서 〈네 멋대로 해라〉가 당대의 도덕적 분위기를 포착하고 있다며 “(험프리) 보가트의 실존적 이미지에 이끌렸던 젊은이들은, 고다르 영화에서 그러한 현상에 대한 최초의 분석을 발견하였다”라고 말한다. 〈네 멋대로 해라〉는 당시 젊은이들의 실존적 권태를 반영한 영화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미셸이 모방하고 있는 험프리 보가트라는 아이콘을 통해, 즉 영화에 대한 참조를 통해 전달되는 셈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자유를 추구하는 무법자이자 사회에 불만을 지닌 괴짜라는 점에서 아웃사이더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진 않는다. 즉 미셸은 영화에 활력을 부여하는 기능적 역할을 할 뿐이다. 그가 범죄를 저지른 뒤 죽음을 맞이하고, 그 과정에서 여자를 배신하는 건 할리우드 갱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모방한 것일 뿐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려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는 삶과 현실(범죄의 세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지금까지 본 영화(갱스터 무비)를 모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3. 인용들
〈네 멋대로 해라〉는 수많은 영화적, 문화적 인용과 오마주로 이뤄져 있다. 먼저 영화는 1930~40년대 할리우드에서 B급영화를 전문으로 만들었던 ‘모노그램’에 헌정한다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당시 모노그램이 주로 만들었던 범죄영화나 누아르, 갱스터 무비로부터 〈네 멋대로 해라〉가 탄생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할리우드 필름누아르에 오마주를 바치면서도 그 스타일은 지극히 다큐멘터리적이라는 사실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밤이 아닌 대낮의 누아르인 셈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인용되는 아이콘은 바로 험프리 보가트인데, 영화 초반부에 미셸은 마크 롭슨 감독의 〈하더 데이 폴〉(The Harder They Fall, 1956) 포스터와 보가트의 사진을 보며 자신을 동일시한다. 고다르는 자신이 존경하는 감독의 영화를 끊임없이 언급하는데, 그가 존경했던 장 피에르 멜빌은 아예 ‘작가 파불레스코’라는 캐릭터로 등장하며, 멜빌의 영화인 〈도박사 밥〉에 대한 인용도 등장한다. 고다르가 좋아했던 할리우드 B무비 감독 새뮤얼 풀러에 대한 오마주도 있다. 풀러의 영화 〈40정의 총〉(Forty Guns, 1957)엔 총구의 시점숏이 남녀의 키스 신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은 〈네 멋대로 해라〉에서 모방된다(총 대신 돌돌 만 포스터가 사용된다).
이외에도 험프리 보가트가 나오는 〈말타의 매〉(1941)의 대사와, 하드보일드 작가인 대시엘 해밋의 소설이 인용되며, 미셸과 패트리샤가 영화를 보는 장면에선 촬영 당시 파리 지역 극장에 걸려 있던 〈웨스트바운드〉(Westbound, 1959)와 〈소용돌이〉(Whirlpool, 1949)가 등장한다. 미셸은 ‘라즐로 코박스’라는 가명을 쓰는데 이 이름은 미셸 역을 맡은 장 폴 벨몽도가 바로 전에 클로드 샤브롤의 〈레다〉(À double tour, 1959)에서 맡았던 역할의 이름이다. 그리고 길거리의 한 여성은, 고다르가 평론을 썼던 잡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를 팔고 있다.
4. 촬영과 편집의 혁신적인 스타일
개봉 당시 〈네 멋대로 해라〉의 관객은 이 영화의 스타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고다르는 라울 쿠타르에게 전체를 핸드헬드 카메라로 찍어 달라고 주문했다. 안정적인 스타일의 극영화가 아닌, 다큐에 가까운 르포르타주 스타일의 영화를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명도 없었고, 쿠타르는 그때까지 영화에서 한번도 사용된 적 없었던 일포드 HPS 흑백 필름을 사용했다. 광량이 부족한 실내 촬영이나 자연광 상태의 야외 촬영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필름이었다. 카메라는 가벼운 카메플렉스(Cameflex) 제품을 이용했다.
더욱 혁신적인 스타일은 편집실에서 만들어졌다. 이 영화 이후 이젠 보편적인 방식이 된 점프컷(jump cut)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그 탄생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최종 편집본의 러닝타임이 너무 길자 고다르는 장 피에르 멜빌에게 자문을 구했고, 멜빌은 액션의 속도를 저해하는 모든 장면을 잘라내라는 충고를 했다. 그런데 이때 고다르는 필요 없는 장면을 들어낸 것이 아니라, 한 신 안에서 필요 없는 움직임을 조금씩 잘라냈다. 그 결과 툭툭 끊기는 듯한 편집, 즉 ‘점프 컷’이 만들어졌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발견한 건,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지루할 정도로 길 때 그 대화의 중간 부분을 잘라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번 시도해봤더니 그 효과가 놀라웠다. 그래서 영화 전체를 통해 이 방식을 사용했다.” 그 결과 〈네 멋대로 해라〉는 촬영된 것과 매우 다른 톤의 영화가 되었고, 장면 전환의 혁신적인 방식을 선보이게 되었으며, 이 방식은 이후 전세계 뉴시네마의 많은 감독들이 모방하는 스타일이 되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고다르 자신은 이후 이 방식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뉴욕 트리뷴을 외치는 극중 패트리샤역의 진 셰버그의 미모와 발랄한 연기가 돋보인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전혀 엿보이지 않을만큼 요정 같은 이미지의 여배우였다. 상대역인 장 폴 벨몽도는 연인의 밀고로 사망을 하며 구역질이 난다는 마지막의 상적인 대사를 남기며 멋대로 살다가는 남자를 훌륭하게 연기해낸다. 하지만 영화가 생각보다 인상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리메이크작인 [브레드레스]는 어떻게 다시 다가올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