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가톨릭을 받아들인 피지배층이, 이를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거나 대규모로 순교하는 일은 중국이아니라 일본에서 먼저 일어났습니다. 역사를 바라볼 때 지배층의 동향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피지배층의 동향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터입니다. 이 가운데 후자 쪽에

의 여파가 서아시아까지 미친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실크로드(비단길)에 빗대어 이를 유황의 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야마우치 선생은과거와 같이 일본 또는 동아시아라는 틀로 역사를 보는 것만으로는이와 같은 글로벌한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지적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일본에서 만들어졌으나현재는 일본에서도 가급적 쓰지 않는 ‘국사‘라는 개념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야마우치 선생의 주장과 같은 글로벌한 관점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가톨릭 신자들을 잇따라 처형하면서 막부의 가톨릭 금지정책은 점점 더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합니다. 1629년에는 나가사키에서 후미에 제도가 시작됩니다. 후미에 제도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가 새겨진 동판을 밟음으로써 스스로 가톨릭 신자가아님을 증명하는 절차입니다. 이 제도의 도입으로 가톨릭 신자가 적지 않게 적발되었고,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가 거의 사라진 뒤에는 일종의 신년 풍습처럼 정착되었습니다. 이듬해 1630년에는 가톨릭에관한 책을 수입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도쿠가와 막부는 네 개의 교역 창구 시스템을 완성했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서 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망상에 빠져서 망쳐놓은 국가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습했다기보다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세 덕분에 한껏 넓어진 일본의 국제적활동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제한함으로써 무사 집단의 이익을 지키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외적으로는 무역이 번성하고 일본인들이 화교처럼 일본 바깥에 집단으로 거주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경제성장에 따라 성치적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피지배민들이 무사 집단에 도전하는 상황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끝내려 한 것입니다.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배 엘리트인 무사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일본이라는 나라의 성장을중단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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