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사무라이 - [초특가판] 일본 고전명작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시무라 다카시 외 출연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2020년 6월 14일 일요일 DVD 평점 4.5점


할리우드 고전영화 박스셋에 이어 일본 고전영화 박스셋을 감상하기로 했다. 주로 구로자와 아키라의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조 감독의 영화도 볼 예정이다. 세 분은 일본 영화계의 3대 거장으로 일본영화의 황금기를 구축했던 감독들인데 요즘 일본 영화계를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한국의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게될줄은 예전에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영화가 일본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것도 사실이고 그중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는 명감독이다. 그의 대표작인 [7인의 사무라이]는 러닝타임 3시간이 넘는 대작이다. 구로자와 감독의 영화중 [이키루]를 제일 좋아하지만 휴가를 맞이해 간만에 코멘터리 버전으로 영화도 공부하는겸 돌려봤다.

크라이테리언 리핑판이기지는 하지만 코멘터리도 한글자막이 있는지라 박식한 해설가의 설명을 들으며 영화를 감상했더니 예전에 봤던 영화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여기에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고 가자면,

˝한자 이름은 흑택명(黑澤明, くろさわ あきら). 키가 187㎝나 되는 거구였던 그는 미국 콤플렉스를 가진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세웠던 감독이었다. 화가를 꿈꾸다 무성영화 변사인 셋째 형의 영향으로 27살에 뒤늦게 영화 조감독이 되었다. 그 뒤 33살에 첫 작품 〈스가타 산시로〉(1943년)로 데뷔했다.

존 포드, 프랭크 카프라, 하워드 호크스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들의 영화세계를 주체적으로 변형해 일본적 미학으로 완성하였다.

1950년 〈나생문 羅生門〉이 제12회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와 제24회 미국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1952년의 〈아끼루〉가 제4회 베를린 영화제의 은곰상, 1954년의 〈7인의 사무라이〉가 제15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이해는 미조구찌 겐지 감독의 〈산숙대부〉도 같은 상을 수상). 1958년의 〈은밀한 요새의 세 악인〉은 제9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 감독상,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등 3개를 수상했다.

1961년의 〈용심봉(用心棒)〉은 제22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가 주연남우상을 수상. 1965년의 〈붉은 수염〉은 모스크바영화제 소련영화노동자동맹특별상,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

1975년의 〈데루수 우잘라〉는 모스크바영화제 그랑프리, 미국 아카데미상외국어영화상.

1980년의 〈가게무샤(影武子)〉는 깐느영화제 그랑프리, 미국 아카데미상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1985년의 〈란(亂)〉은 미국 아카데미상 의상디자인상으로 와다에미가 수상했다.

‘내 머리 속에는 일본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동거하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일본이란 한계를 넘어선 연출로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세계의 구로사와‘라는 애칭으로 일본 영화팬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다.

구로사와 감독의 작품 표현은 힘이 강하고, 뼈대가 굵고, 다이나믹하고 남자답다. 그런데 구로사와 감독의 실상은 그 작품과는 달리 섬세한 신경의 소유자로 작품의 그 남자다움은 자신이 갖추고 있지 않는 동경의 남성상이 아닐까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분석이 정확한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구로사와 감독은 1971년 12월 22일 자택에서 면도칼에 의한 자살을 시도 했었다. 일찍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지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원인으로 1967년 미국 영화 〈토라! 토라! 토라!〉와 얽인 사건, TV 영화의 부조리, 구로사와 프로덕션의 적자 문제 등 여러가지 억측이 난무했지만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촬영하고 싶어도 아무도 제작비를 대주지않고, 오랫동안 촬영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영화 작가로서의 신경을 날카롭게 한 것은 아닐까.

1970년 〈도데스까덴〉을 최후로 일본에서 구로사와 아끼라 감독에게 출자하려는 제작자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게무샤〉(80)에 도호영화사가 출자했을 뿐 그후는 모두 외면을 했다. 〈데루스 우잘라〉(75)는 소련, 〈란〉(85)은 프랑스, 〈꿈〉(90)은 미국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비를 지원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세계의 영화제가 구로사와 감독을 신처럼 치켜세우게 된 1970년대 이후로 일본의 영화계는 구로사와 감독을 짐으로 생각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로사와 감독은 그런 일본영화계의 냉대에도 꺾이지 않고, 차가운 대우를 받을 수록 그 재능을 더욱 화려하게 개화시키고 있다. 맹렬한 에너지로 초대작에 매달려 중후한 작품을 통해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정말로 거장에 걸맞는 작품뿐이다. ˝영화에 국경은 없다. 영화를 통해 세계의 사람들과 대화해가고 싶다.˝는 것이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만들기 자세다.

그는 사랑, 갈등, 욕망 등을 주제로 한 세계적인 문호의 작품을 각색해 중세 일본의 현실로 옮긴 영화들을 주로 찍었다. 〈거미집의 성〉은 〈맥베스〉를, 〈난〉은 〈리어왕〉을, 〈산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각색했고, 이들은 원작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았다. 서부영화도 창작의 원천. 〈요진보〉 〈7인의 사무라이〉 〈쓰바키 산주로〉 등이 그 예다. 특히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는 일본이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16세기 말 사무라이 버전인 〈7인의 사무라이〉로 탈바꿈시켰다. 이 작품은 서양으로 미국에 역수출돼 존 스터지스의 〈황야의 7인〉을 낳았다. 〈요진보〉는 다시 세르조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1964) 등 수많은 아류를 낳았고, 1996년 월터 힐 감독이 정식으로 다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의 16세기 인물은 조지 루커스의 〈스타워즈〉에 미래의 세 인물로 치환됐다. 한국에는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마지막 결투장면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구로사와 감독은 절대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다. 엄격한 자세로 임한다. 도스토엡키 원작 〈백치〉(51)에서는 원작에 너무나 충실하다보니 완성된 작품은 4시간 25분의 긴 작품이 되었다. 그 무렵은 아직 제작회사가 구로사와 감독에게 주문을 할 수가 있어서, 짧게 커트되었지만 그래도 2시간 46분의 작품. 그것에 대해 구로사와 감독은 ˝이것 이상 끊으라고 한다면 필름을 세로로 끊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란〉에서 성 세트를 4억엔(22억원) 들여 만들어 그것을 태우는 것을 본 기자가 ˝안타깝다˝고 중얼거렸더니 ˝태우기 위해서 만들지 않았는가˝라고 구로사와 감독은 말하기도 했다.

구로사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코드는 대결. 일본 전통무술인 유도를 소재로 한 〈스가타 산시로〉나 사무라이 액션을 소재로 한 〈7인의 사무라이〉,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대립 구도를 다룬 〈악인이 더 편히 잔다〉 〈스캔들〉, 자연 및 운명과 대립하는 〈데르수 우잘라〉 〈난〉, 사제의 대립 구도를 다룬 〈붉은 수염〉, 〈조용한 결투〉 등 그의 작품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20여편이 결투와 대립이 모티프다.

1971년 자살 미수 소동을 벌였으나 그 후 재기, 소련 영화 〈데르스 우자라〉(75)의 메가폰을 잡아 아카데미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

1976년 영화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문화공로상을 수상했으며 이때 수상 소감으로 ‘영화에 대한 정치의 무관심‘을 비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80세 넘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계속, 90년에 동양인으로 최초로 아카데미상 특별 공로상을 받았고, 91년엔 〈8월의 랩소디〉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그 후 지병으로 공식 활동을 중단했다. 47년 동안 28편 밖에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그는 98년 9월 6일 88세로 사망했다. 일본 영화계에선 ‘패전 후 침체돼 있던 일본사회에 희망을 준 영화인‘이라고 추모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콜세지를 비롯, 세계의 영화인 가운데 구로사와 감독의 심취자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그 완전주의, 3대의 카메라에 의한 동시 촬영, 꼼꼼한 리허설, 그리고 영화계의 ‘천황‘이라 불리고 또한 거기에 걸맞는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가타부타 말할것 없고 안 보셨으면 한번쯤 감상하실것을 추천드린다. 마구 뛰어다니는 단신의 일본 배우들이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매우 치밀하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코멘터리 버전에서도 미후네라는 뛰어난 배우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그의 과장된 연기도 전부 설정된거라면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좀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아래의 사이트를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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