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가 크게 실망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주머니는 늘 예의가 있고 자상했다. 나는 밥을 다 먹어 치우고싶었으나 3분의 2 정도만 먹고 남겼다. 반찬 자국이 전혀 없이 아주 깨끗한 하얀 밥을 남겼다. 한국 사람들은 남은 밥은 나중에 다시 섞어서 나누어 먹기 때문에 밥을 다 먹을 수 없으면 아주 깨끗한 상태로 남겨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알게 되었다.

"당신 같은 외국인이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요."
다른 학생이 이렇게 말했을 때 엄청난 책임감이 느껴졌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깊은 수렁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이미 우체국 앞에서 할머니로부터 임무를 부여 받았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내가 만일 이곳을 벗어나 목격한 것을 사실대로 말한다면 한국정부는 나를 추방시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국을 떠날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평화봉사단의행동 가이드라인을 따르고 싶었다. 관여하지 말고, 정치적 행위를 하지 말라. 그 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의견을 말하지 마라. 손님으로서 당신의 위치를 손상하는 행위를 하지 마라. 하지만 이제까지 보고 겪은 사태에 대해이런 지침을 지키는 게 가능한 것일까?

"네. 조심하겠습니다. 군인들이 보이면 돌아올 겁니다. 당신 통역을 맡게 되어서 좋았어요. 여기 소식을 세상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모인 기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많은 일들이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개되었다. 이제 내 계획을 실행할 차례였다.
나는 증인으로 책임에 충실할 의무가 있었다. 사태를 목격하는 것과 그걸기록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통역을 통해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기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잘 알고 있는것 같았다. 관찰하고 기록해야 할 때와 개입해서 도와야 할 때, 그리고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개입해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그렇지 못했다.

아버지는 1980년 하반기에 돌아가셨다. 1981년 중순, 평화봉사단 한국 사무소는 문을 닫았다. 평화봉사단 임무는 다 끝났으나 아직은 한국을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국제학교에서 교사 자리를 얻었다.
1982년 9월, 나는 한국을 떠났다. 왜 머물렀을까? 한국의 어떤 역사는 고통스러웠지만 한국과 한국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전두환의 군사정부는 광주의 진실을 외면하고 계속 왜곡했다. 많은 이야기가 공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당시의 내 노트, 편지, 사진 등 자료들을 꺼내 이 책을 쓰기까지 40년이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광주를 기억한다는 일 자체가 내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고, 일에 몰두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고, 지난 20년 동안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일을 했다. 두 아들도 그곳에서 자랐다.
학살이 시작된 날인 5.18로 통칭되고 있는 당시의 항쟁이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나보다 학식이 훨씬 뛰어난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기록했다.
내가 이 회고록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두 가지다.
첫째, 이 회고록을 통해서 서구인, 특히 미국인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갖기를 원했다. 미국인들 중에서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광주항쟁 기간 중 워싱턴 주의 헬레네 화산이 폭발해 광주 소식이 미국 언론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둘째로, 내게는아직까지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심리적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는 회고록집필 작업을 통해 대처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2020년이5.18의 40주년이라는 것이 나에게 또 다른 자극이 되었다.

나는 사건이 일어났던 기간 동안, 또 그 후 이 사건을 다시 쓰는 과정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군인들의 끔찍한 행동을 목격한 후에는 그들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개인적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또한나는 자신들이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받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 하는 한국인들의 열망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1980년의 미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나는 이 책을 쓴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리 공동의 역사, 공동의 열망, 나아가 공동의고통을 서로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배워야 할 것이 정말많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우리는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공격하기 전에는 폭력이나 폭동과 같은 시위를 전혀 목격하지 못했다. 또한, 군인과 경찰이 도시에서 철수한 후시민들에 의한 폭동도 전혀 보지 못했다. 우리의 추측에 의하면, 여기저기서 국지적 민간인에 의한 폭력 사태는 있었겠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확실한 것은, 군인들이 시위대를 진압하던 때를 제외한다면, 미국의 도시폭동(예를 들어 마이애미 폭동과 같은)과 같은 무분별한 파괴나 약탈행위는 없었다는 점이다.
폭력 사태는 월요일에 시작되었으며, 군인들(경찰을 포함하여)이 도시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됐다.
월요일에 많은 차량들과 버스들이 불에 탔다. 일반 시민들이 정확히 언제 학생들과 합세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아마도 월요일 밤부터 그랬던 것같은데, 화요일 이전인 것은 확실하다.

의해 오염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당시광주에 진입한 군인들은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사실 그리 놀랍지 않다. 군인들의 이러한 오해는 정말 비극적인 사태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군인들이 공산주의 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청 진압 당시 사상자의 수는 의외로 적었다는 점이다.

광주는 학생 또는 반체제 인사들이 점령한 위험한 도시가 아니었다. 광주는 위기 아래에 시민들이 하나로 뭉친 도시였다. 이 위기는 도시 밖에서 온 것이고, 집단이 위기에 처하면 결집력이 강화되듯이 광주도 그런 과정을 밟았을 뿐이다. 시민들은 경찰과 진압기동대에게도 온정을 베풀었고, 그들이 광주 시민들을 적대적으로대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광주 시민의 적대심은 야만적으로행동한 공수부대와 중앙정부를 향했었다.

이 회고록은 아마도 광주항쟁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이 기록한 최초의출판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광주 시민이 아닌 외부인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소중한 자료이며, 광주항쟁을 둘러싼 수많은 왜곡과 폄훼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인지를 반증하는 증언록의 가치를 갖는다. 저자의 긴박감 넘치고 유려한문장력과 유머 감각은 이 회고록이 기록문학 작품으로서도 손색이 없음을보여주고 있다. 사회과학자인 내가 그 솜씨를 제대로 옮기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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