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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평점 :
다시 생각해도 참 무심한 논리다. 한 사람의 지적‧정서적 무능이 출산 경험의 부재에서 왔다는 발상. (…) 그건 애 낳지 않은 여자들에 대한 집단적 모독이고, 애 낳은 여자들에 대한 편의적 망상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형성은 ‘출산’ 유무와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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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에서 책을 잠시 뒤적이다 구입하게 된 결정적인 부분이다.(밑줄긋기 p.30) 책에서는 세월호 사건에 대해 참으로 무감하신 당시 대통령을 일화로 들었지만,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정말 많이 듣는 말이다.
“애를 안 낳아봐서 그래.”
이상하게도 이 말은 대부분 아이가 있는 엄마들 입을 통해 듣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뭔가 본인의 사회적 성숙도가 업그레이드 된 기분인걸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말을 맥락 없이 쉽게 입에 올리는 사람은 출산 여부와 상관없이 정말 별로인 지성을 소유하였음을 스스로 떠들어대는 것임을 알기를. 아이를 낳아봤다는 것으로 자신의 성숙도를 증명하고자 하는 이 일수록 자존감이 낮아 보여 은근 안쓰럽다. 지적‧정서적‧공감적 무능은 그냥 그 사람의 인격적 그릇이 그런 것이다. 실제로 자기 아이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부모의 행태를 말해보라면 우리 수십 건 쯤은 쉽게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하나. 아이를 낳고나서야 가게 되는 곳. 소아과. 봉봉이 첫 예방접종을 맞히러 간 그 소아과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이 떠오른다. 소아과 의사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아이를 사랑하는 밝고 친절한 의사선생님의 이미지는 애기봉봉이를 안고 진료실에 들어선 순간 들리는 날카로운 고주파 소리에 와장창 깨지고 만다. “아니, 쟤는 왜 울고불고 난리야!! 이상한 애야.” 앞서 진료 받고 나간 아기 뒤에 대고 내지르는 짜증 가득한 소리. 그 아기가 엄청 울긴울었다. 진료실 밖에서도 생생하게 들렸으니.. 근데 여기는 어디? 소아과. 소아과는 뭐하는 곳? 아픈 아이들이 오는 곳. 아기가 아프면 어떻게 해? 울어. 안아파도 우는게 아긴데, 아프니까 더 울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인데, 일류 의대를 나오신, 자식도 있으신 저 소아과 전문의 선생님은 전혀 모르시는 듯 했다. 자. 여기서 다시 돌아가서. 그래서 인간적인 성숙도는 출신 대학, 직업, 출산 유무와 상관관계가 매우 낮다는 걸 체득하여 나름 정신적인 충격을 먹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의사는 그냥 인간적인 그릇이 그 정도였던 것이다. 자기 그릇이 아닌데 그렇게 살려니 얼마나 힘들꼬.. 쯧쯧 불쌍타 해주고, 그 다음번엔 바로 봉봉이의 주치의를 바꿨다. 다행히도 그 종지 그릇 인격의 의사 대신에, 아파서 빽빽 우는 아이들도 예뻐하시고 엄청 친절하신 ‘미혼’의 의사선생님이 오셨다. 그리고 12살이 된 큰 봉봉이를 지금까지도 늘 웃는 얼굴로 꼼꼼하게 잘 봐주시고 계신다.
애를 안 낳아봐서 그렇다구? 개뿔!!!!!!!!!
p.30 "애를 안 낳아봐서 그렇다는 말" 다시 생각해도 참 무심한 논리다. 한 사람의 지적‧정서적 무능이 출산 경험의 부재에서 왔다는 발상. (…) 그건 애 낳지 않은 여자들에 대한 집단적 모독이고, 애 낳은 여자들에 대한 편의적 망상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형성은 ‘출산’ 유무와 상관이 없다.
p.31 애 낳고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부터도 출산 이후, 즉 육아 집중기에는 신문을 챙겨볼 시간도 행동하는 시민으로 살 기운도 없었다. 나에게 엄마로 사는 건 인격이 물오르는 경험이 아니었다. 외려 내 안의 야만과 마주하는 기회였다. 태아가 물컹한 분비물과 함께 나오는 출산의 아수라장을 경험하는 것부터 그랬다. 그 생명체가 제 앞가림을 할 때 까지 나는 혼자 있을 권리, 차분히 먹을 권리, 푹 잘 권리, 느리게 걸을 권리 같은 기본권을 몽땅 빼앗겼다. 그런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실존의 침해를 감내하다 보면 피폐해진다. 성격이 삐뚤어지고 교양 허물어진다. 육아의 보람과 기쁨을 위안으로 삼기엔 그것과 맞바꿀 대가가 너무 크고 길다. 그 사실을 경험하기 전에는 모른다.
p.32 인간적 성숙은 낯선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자기와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일어나는 것이다. 엄마라는 생태적 지위는 성숙에 이르는 여러 기회 가운데 하나일 뿐 저절로 성불하는 코스가 아니다. 그나마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고통의 자산화가 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문화적 자원이 있어야 한다. 애 키우고 먹고사느라 하루하루 허덕이는 여성은 그럴 겨를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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