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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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의 재미있는 점 중 하나는 등장인물 중 단 한 명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크맨, 어쩌면-남자친구,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진짜 밀크맨), 가장 오래된 친구,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핵소년, 알약소녀, 알약소녀의 동생 등등.. 주인공 소녀에게 조차도 이름은 주어지지 않는다. 지명도 없다. 십분 지역, 일상적인 장소.. 뭐 이렇다.  나라나 도시 같은 사회공동체도 이름이 없긴 매 한가지. 우리 아니면 저들, 우리 종교 아니면 다른 종교, 길 이쪽 아니면 길 저쪽, 물 건너, 국경 건너.. 이름조차 과거로부터 이어온 공동체로부터 허가받아 결정되는 억압적인 배경이라 그런지 정체성이 드러나는 고유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다. 가만 보니 밀크맨을 제외하곤 뭔가 누군가와 관계성이 드러나는 이름인 것 같다. (스포주의!) 관계가 바탕이 되지 않고 그냥 지칭된 대상. 밀크맨, 핵소년, 알약 소녀는 모두 죽는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는 억지를 부리던 차. 근데 밀크맨이 왜 밀크맨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 열여덟 소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뭐라고 불렸을까. 걸으면서 책 읽는 소녀? 슬픈 남자의 딸? 어쩌면-밀크맨의 애인? 이 깨어나는 소녀는 자기 이름을 찾았으면 좋겠다. 빛나는 이름으로.

 

저쪽 세상에서라면 나는 뭐라 불릴까. 그리고 이쪽 세상에서는..

여전한 무명씨.  

 

p.43
그런데 써도 되는 이름의 목록은 없다. 누구든 허락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허락되는 것을 짐작해야 한다.

p.117
내 옆에서 어쩌면-남자친구와 주위의 이상한 사람들은 전부 해넘이를 보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내가 저 사람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야 하고 생각하던 바로 그 순간, 그곳에서, 문득 내 안에서 무언가가 바뀌었다. 파란색, 파란색, 또 파란색-모든 사람이 알고 당연히 거기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공식적 파란색이 아니라, 진실이 내 감각을 두들겼기 때문이다. 거기에 파란색이라고는 한 점도 없다는 게 점점 확실해졌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색을 봤고 일주일 뒤에 프랑스 수업에서도 색을 보았다. 그때도 이때도 색이 물들고 녹아들고 흘러들고 번지고 새로운 색이 나타나고 모든 색이 섞이고 색이 영원히 이어졌는데 딱 한 가지 색 파란색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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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2020-09-03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놓고 읽지 않고 있었는데, 쓰신 후기를 보니 호기심이 생기네요. 조만간 읽어봐야겠습니다~!

무식쟁이 2020-09-07 23:35   좋아요 0 | URL
흥미진진한 사건 중심 소설이 아니라 그런지 초반부에는 책장이 잘안넘어갔어요. 중반부쯤 작가의 특별한 입담에 익숙해지고나니 소녀 내면의 꽉찬 서사가 좋더라구요. ^^ 반갑습니다, 클로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