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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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의 정물. 끼어들 틈 없는 무력함. 벌레의 눈으로  보는 삶. 넌.

 

겁이 많아 거북이.  6년째 같이 살고있는 우리 거북이들을 봐도 쫄보도 그런 쫄보들이 없다. 껍질이 그렇게 단단한데 왜?.. 그래서 껍질이 단단해진 걸까.

 

책이든 사람이든 무언가 내게 날아올 때 휘청하며 흔들릴 때가 있다. 떨림. 떠나는지도 모르게 빠져나가는 게 현실이지만, 예상치 못한 떠남에는 파동이 남는 때가 있다. 흔들림. 그리고 다시 멈춤. 때로는 날아든 지도 모르는 채로, 퍼뜩 놀라 고개 드니 이미 퍼드득 떠났더라. 그래도 다시 멈추겠지. , 이제 다음 흔들림.

 

 

 

p.28 「모르는 영역」
어디선가 새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날갯짓의 급격한 감속, 날개를 접고 사뿐히 가지에 착지하는 모습, 가지의 흔들림과 정지…… 그런 정물적인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새는 돌연 가지를 박차고 날아갔고 그 바람에 연한 잎을 소복하게 매단 나뭇가지는 다시 흔들리다 멈추었다. 멍하니 서서 새가 몰고 온 작은 파문과 고요의 회복을 지켜보던 그는 지금 무언가 자신의 내부에서 엄청난 것이 살짝 벌어졌다 다물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새가 날아와 앉는 순간부터 나뭇가지가 느꼈을 흥분과 불길한 예감을 고스란히 맛보았다. 새여, 너의 작은 고리 같은 두 발이 나를 움켜잡는 착지로 이만큼 흔들렸으니 네가 나를 놓고 떠나는 순간 나는 또 그만큼 흔들려야 하리.

p.92 「희박한 마음」
디엔이 겉옷에 달린 모자를 덮어쓰며 거북이가 되자고 했다. 데런도 겉옷에 달린 모자를 덮어썼다. 모자를 쓰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지 않느냐고 디엔이 물었고 데런은 그렇다고, 거북이처럼 숨을 곳이 생긴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p. 208 「재」
이해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그렇게 자꾸 날 의심하는 일, 그만하고 싶어요. 고단해요 나도. 이제 늙었기도 하고. 도대체 누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p. 211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린 정물화인 듯, 그가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허구인 듯 여겨졌다.

p.276 (해설: 당신이 알고 있나이다)
새로운 소설을 읽을 때, 또다른 사연과 의미를 만날 때, 우리는 "무엇인가가 드러나기보다 사라진다는 느낌"(250쪽)도 받는다는 것이다. 읽는 행위 속에서, 전에는 또렷했던 무언가가 희미해진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같은 쪽) "무언가 희미하게 점멸하며 살아 있다."(같은 쪽) 그러니까 점점 쌓이고 넘치는 게 아니라 희미한 것들이 깜빡이다 사라지고 또 나타나는 것이겠다. 몰랐던 세계를 찾는 것과 알았던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함께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을 때의 깜빡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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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6-22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전 사두고 아직 읽으려면 멀었네요. 무님이 먼저 읽으셨으니 따라 읽어야지...

무식쟁이 2020-06-22 17:48   좋아요 1 | URL
반반님 따라 읽다간 가랑이가 찢어질테니 난 안따라 읽을거요. (비장)

반유행열반인 2020-06-22 19:45   좋아요 0 | URL
아니 무어가 왜요 ㅎㅎㅎ저보다 먼저 읽는 책도 많으신 분이 겸손하기까지...저는 따라가려면 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