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늦게 퇴근하셨다. 저녁 식사가 평소보다 늦어졌다. 상을 물릴 때는 9시 때쯤이었는데, 현관문을 손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초인종이 있는데도 말이다. 늦은 시간이라 아버지가 직접 나가셨다. 알라딘에서 온 박스였다. 엊그제 주문한 책들이었다. 나는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손이 아프게 문을 노크한 그 분이 궁금해졌다. 저녁은 드셨는지, 무슨 일로 이리 늦게까지 일을 하시는 건지. 초인종을 누르지 못한 그 세심한 배려를 생각하니, 기다리던 책이 와서 기쁜 마음보다는, 갑자기 죄송한 마음이 일어났다. 곧 설 연휴라서 택배 물량이 20-30 퍼센트 정도 늘었다는 뉴스를 오늘 아침에 봤는데, 혹시 그때문인가. 우리 아버지도 택배는 아니지만, 물건을 차로 나르는 일을 하시는데, 아침 7시에 나가시면, 저녁 7시가 되셔야 들어오신다. 책을 사서 읽는 나의 노력들이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제의 고민을 다시 이어가는 밤이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_ 이윤기
최근에, 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를 읽고,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알게 되었다. 황현산 선생님은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나오셨을 때, 방송을 시작하면서 '말을 실수할까 봐 걱정이 된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셨다. 거짓이 아닌 진실된 말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씀 한 마디에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게 되었다. 너무 속되고 거짓된 말들을, 허황되게 늘어놓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렵고 부끄러워졌다.
그런데, 이 책은.. 황현산 선생님이 '언어 천재'라고 부르는 이윤기 선생님의 책이다.
다시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방언정담 _ 한성우
이 책은 언어학자인 저자가 20년 넘게 방언을 조사, 연구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엮은 책이라고 한다.
오늘 낮에 몸이 편찮으신 엄마 옆에 앉아, <전라도닷컴>을 읽어 드렸다. 전라도 방언을 그대로 표기하고 있는 이 잡지는, 인간다움이 있고, 삶의 생동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어른들의 말씀이 마음을 된통 흔들어 놓기 때문에 특별히 애정하는 책이다.
"암시랑토 안혀. 개보와." 이 구절을 읽다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담양이 고향이다. "개보와? 개보와가 뭐야, 엄마?" "가볍다는 뜻이지~ 아무렇지 않다. 맴이 가볍다." 나도 이 잡지를 구독한지 일 년이 넘었고, 전라도 사투리는 많이 들은 편이지만, 낯선 것들이 툭 튀어나올 때가 많다. 특히 소리내어 읽을 때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 말을 어떤 온기로 했을까, 저절로 생각이 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른들의 말씀은, 별 것 아닌듯이 지나가도, 인생의 철학이 있다. 정겹고 따뜻하다. <방언정담>은 그런 의미에서 읽어보고 싶다. 살아 있는 말들, 그 온기가 무엇인지.
시적 정의 _ 마사 누스바움
지난 월요일, 심보선 시인의 강연을 듣고 왔다. 시인으로서의 분인과 사회학자로서의 분인을 통해 스스로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소개하는(심보선, '그을린 예술') 그는 이 책을 들고 와서, 요즘 읽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법철학자, 정치철학자, 윤리학자, 고전학자, 여성학자인 저자가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에 대해 쓴 글들이다.
문학을 읽는 것이 책임 있는 시민을 길러내고,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밑바탕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설명이 게재되어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생각난다.
프랑스에 가기 위해서 1월과 2월은 긴축재정으로 살아야 하는데, 결국 책을 사는 데에 지출을 하고 말았다. 잘 읽자. 책을 가지고 갈 수는 없지만, 읽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은 내 안에 담아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