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풍경

 




사람의 얼굴은
유전적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도중에 자신의 성격대로 자신의 이미지대로
변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 얼굴의 변천사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마치 매일 가는 산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면 그 풍경이 바뀌듯 얼굴도 나이에 따라서
그 풍경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굴은 그 사람의 역사이며 살아가는 현장이며
그 사람의 풍경인 것이다.




- 최인호의《산중일기》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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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신뢰




아버지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들에게 당신과 아내의
안전을 믿고 맡긴 것이다. 로테 투름 봉 서쪽 벽의
가파른 슈미트 침니 구간에서 부모님을 자일에
연결시킬 때 나는 깊은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부모님은 조용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25미터 높이의 거의 수직을 이루는 침니를
자일로 타고 내려갔다.




- 안디 홀처의《그래도 나는 내가 좋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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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업실과 나무 심을 곳을 둘러본 그 날, 그는 내 집에 묵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내가 저녁식사와 술안주를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맹렬해져 갔다. 나는이야기의 열기가 조금 숙어드는 시간을 낚아채어 잽싸게 읍내 정육점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작업실 마당의 널평상에 앉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몸을 뺄 틈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나무를 심는데?"

 "그냥 나무가 좋아서요." 

 나는 그의 맹렬한 기세에 질려 있었음에 분명하다.

 "좋은 까닭을 설명해 보라니까."

 "그냥 좋다니까요."

 "아까 낮에 그러지 않았어? 보람 있는 일로 느껴진다고."

 "사실은 나무로써 '시간 박물관' 같은 거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기념 식수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좋다."

 "백 년, 이 백년 세월이 흐르면 볼만 해지지 않겠어요?"

 "천년, 이천 년 세월이 흐르면 더 볼 만 해질 테지. 좋다. 시간에다 다는 방울 같은 것이다. 나무라는 것이."

 "방울?"

 "시간에 방울을 달아 놓으면, 설사 그것이 쇠 방울이라고 할지라도, 세월을 어찌 보내느냐에 따라 은방울로 되기도 하고 금방울로 되기도 한다고 들었다. 세월을 잘못 보내면 쇠 방울은 녹슨 쇠 방울로밖에는 되지 못할 테지. 세월에 주머니를 채워 놓으면 그것이 빈 주머니라 할지라도 세월을 어찌 보내느냐에 따라 그 주머니가 은돈으로 차기도 하고 금돈으로 차기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시간에 방울을 매달지 못했고 주머니도 채우지 못했다. 당신 말이야,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왜 그 오랜 세월 잊히지 않고 불리는 지 알아?"

 나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내 말이 그 말입니다'가 입가를 맴돌았다. 나는 그가 그 까닭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벌써 짐작하고 있었다. 그와 내가 이인삼각 二人三脚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에 방울을 달지 못한 자들의 노래야. 그런데 당신은 통 말을 하지 않는군? 나만 지껄이게 만들고 있어. 아까부터."

 나는 아무래도 그의 생각과 비슷할 터인 내 생각을 쏟아내기로 했다.

 "선배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어요. 일주일 전부터... 말, 할게요. 하면 될 거 아닌가요? 21세기가 시작되는 해인 2001년 오월, 저의 작업실 앞에서 여섯 그루의 잣나무가 자연 발아했어요. 칠십 년 가까이 된, 제 작업실 앞의 잣나무에서 떨어진 잣에서 발아한 것이지요. 잣 깍지 쓰고 세상으로 나온 아기 나무가 잣 깍지를 벗는 것까지 저는 관찰했어요. 21세기의 시작을 기념할 만한 나무같아서, 돌멩이를 주워, 사람이나 짐승이 아기 나무를 밟지 못 하도록 울타리를 만들어 두었어요. 한 해 동안 5센티 크기로 자라나더군요. 칠십 년 뒤에는 아름드리로 자라나 있겠지요. 저는 아기 잣나무와 늙은 잣나무를 갈마들이로 바라보면서 결심했어요. 시간을 기억하고, 세월을 기억하는 데 필요한 눈금을 땅에다 새기고자 결심했지요.

 저의 몸, 이거 시간의 눈금입니다. 저는 1947년생입니다. 저의 몸은 1948년생인 대한민국보다는 조금 더 오래된 것이지요. 1950년에 터진 6. 25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지요. 4. 19도, 5. 16도 제 몸에는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월남전의 저의 몸 아주 깊은 곳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몸은 세월의 눈금으로 그리 오래는 남아 있지 못합니다. 선배의 몸이 그렇듯이요. 다른 눈금이 필요합니다. 나무, 저의 오래된 꿈입니다.

 저는 '부질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이 건물 들일 때, 처음에는 건물이 들어서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둘까 하다가 부질없는 짓 같아서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무 앞에서는 '부질없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러니까 이 작업실 주위에다 '조그만 시간 박물관'같은 것을 꾸미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 시간(세월)의 눈금을 저는 새로운 시계로 삼고자 하는 겁니다. 저는 나무를 심을 때마다 그 나무 밑에 조그만 비석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저도 은행나무를 심고 싶습니다. '내가 나무를 심기 시작한 해'의 기록은 은행나무 밑에다 남겨두려고 합니다. 주목 朱木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이땅에 남아 있는 나무라지요. 통일이 되면 주목 밑에다 비석을 남길 겁니다. 세월이 흘러, 저도 선배도 이 세상을 뜬 뒤에도 나무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이 땅에 남은 채로 세월의 부피를 증언할 거 아닙니까. 꿈이 너무 사치스러운가요?"

 '아니다, 조금도 사치스럽지 않다. 당신 멋지다. 이제 나도 내 생각을 말하겠다."

                                                                                                    ( P.78~81)

 

 

하지만 나는 시간에 방울을 매달지 않았다. 매달 줄 몰랐던 것이다, 시간에, 세월에 저항하는 인간에게 흘러가는 봄날은 처참한 것이다. 시간에 저항하는 인간에게 <봄날은 간다>만큼 잔인한 노래는 없다. 세월로부터 진급을 보장받지 못하는 인간들, 세월로부터 퇴직금도 연금도 약속받지 못하는 인간들이 누구인가? 시간에 방울을 달지 못한 인간들이다. <봄날은 간다>를 가장 잘 부르는 인간들은 아마도 이런 인간들일 것이다.

                                                                                    (P.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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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의《고향》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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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입니다. 너무너무 덥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손님들은 한 분도 덥다고 투정하질 않습니다.

점심 무렵이었습니다. 손님 한 분이 오셨습니다. 옷이 흠뻑 젖었습니다. 물에서 금방 건진 옷처럼 젖었습니다. 왜 이렇게 땀을 흘리셨는지 물어봤습니다. 자유공원에서부터 걸어왔더니 그렇다고 합니다. 선풍기 바람이 참 시원하다고 합니다.

민들레국수집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한 번도 켜지 못했습니다. 전기료가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에어컨을 틀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스밥솥에 밥을 하면 금새 찜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풍기 몇 대로 여름을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삼복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덥다고 투정하지 않는 우리 손님들입니다. 어느 곳을 가도 시원한 곳이 없기에 어서 빨리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민들레국수집에서 제일 더운 곳은 주방입니다. 국을 끓이고 채소를 데치면 사우나보다도 더 덥습니다. 그런데서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자원 봉사자 자매님들이 음식을 만드십니다. 천사같은 분들이십니다. 겨우 수박 한 쪽에 행복해 하십니다.


72세 할아버지가 오늘 오셔서 담으신 밥입니다. 할아버지는 혼자 사십니다. 물론 노숙을 하고 계십니다. 하루 두 번은 오시라고 협박을 해도 웃기만 하고 꼭 한 번만 오십니다. 몇 달 전에 처음 오셔서 밥을 접시에 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다 드실 수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깨끗하게 다 드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끔하게 산더미 같은 밥을 다 드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처음처럼 드시질 않습니다. 거의 삼분의 일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드셔도 이제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합니다.

 

                                              -민들레국수집, 민들레소식 7/24 여름-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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