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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탕 선녀님 ㅣ 그림책이 참 좋아 7
백희나 지음 / 책읽는곰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같이 비가 추적추적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진 날엔, 문득 목욕탕엘 가고 싶다.
내게 '목욕탕'이란 단어는 오래된 사진첩의 흑백사진과도 같다. 어린날의 추억같은.
오전에 어디에서 백희나의 '장수탕 선녀님'책을 보내주었다. 상자를 여니 거기에는 아, 아주 으스스한 할머니가 요구르트를 황홀한 표정으로 빨고 있었다.
'목욕합니다'란 빨간 입간판이 서 있는 어스름한 풍경속의 사진이 나오고 ' 우리 동네에는...아주아주 오래된 목욕탕이 있다.'란 말을 시작으로 이 그림책은 시작된다.
큰 길가에 새로 생긴 스파에는 불가마도 있고, 얼음방도 있고 게임방도 있다는데 엄마는 덕지를 데리고 오늘도 장수탕으로 간다.
그 곳에서 덕지는 가장 좋아하는 냉탕에 들어가 '풍덩풍덩' '어푸어푸' '꾸르륵' 신나게 노는데 어떤 이상한 할머니가 나타나 자기는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라며 덕지랑 냉탕에서 함께 즐겁게 논다. 그리고 사람들이 먹고 있는 요구르트를 가리키며 저게 무엇이냐고 맛있게들 먹고 있구나, 묻자 덕지는 뜨거운 탕에 들어가 꾹 참고 때를 불리고 눈물이 나려는 걸 꾹꾹 참고 엄마에게 때를 밀고 드디어 엄마가 하나 사준 요구르트를 선녀할머니에게 드린다.
목이 조금 말랐지만 참을 만했고 다음에 또 할머니랑 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온다.
그런데 냉탕에서 놀았던 탓인지 콧물도 나고 머리도 지끈지끈 한밤중에 잠이 깨어 목구멍이 따끔따끔 온몸이 후끈후끈 너무 아파..하는데 그때 할머니가 나타나 "덕지야, 요구릉 고맙다. 얼른 나아라"하며 이마에 손을 대주시고 아 ...시원해 하며 잠든 덕지는 다음날 아침, 거짓말처럼 감기가 싹 나아서 "고마워요, 선녀할머니!" 하며 이 그림책은 끝난다.
솔직히 말하면 짧은 이 내용에 클레이 점토로 만들어진 그림들도 예쁘진 않았다. 아 아기들을 위한 그림책이라 단순하구나, 하며 아주 짧은 시간에 후르륵 읽고 이 책 역시 지난번 '구름빵'이나 '달 샤베트'처럼 꼬맹이들이 있는 지인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을 하고 있는데도 자꾸 그 예쁘지도 않은 그림책의 장면들이 자꾸만 내 마음의 방에 들어와 살아 나더군. 그리곤 아주 어렸을때의 뿌연 김서린 목욕탕에 갔던 추억들이 몽실몽실 떠올라..그 아득하고도 따뜻했던 유년의 기억들로 마음이 단풍처럼 물들어 갔다.
요즘 아이들은 아마 대부분이 이런 장수탕같은 목욕탕엔 잘 안 가봤을 것 같다. 우리집 아이들도 아파트에서 태어나 집의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사우나는 찜질방 갔을때나 가니 말이다.
그리고 나도 대중탕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어쩌다 아주 드물게나 사우나에 간다.
언젠가 '어머니전'이란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보니까 백희나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목욕탕에 데리고 가면 세 딸을 한명 한명 때를 밀어 줄때마다 구연동화를 한 편씩 해주며 목욕을 시켰다는 말이 나온다. 그 때의 목욕탕에 대한 좋았던 추억이 남아서 이 '장수탕 선녀님'을 만들었다 하고.
내게는 어렸을때 엄마나 집에서 가정교사겸 도우미를 했던 혜숙언니와 눈앞이 안보이게 김이 서리고 사람들 목소리가 붕붕 울렸던 목욕탕엘 가서 때를 밀고 목욕이 끝나면 벌꿀구론산인가도 먹고 딸기우유도 먹고, 어느땐가는 동대문운동장 옆에 사는 친구네 동네목욕탕엘 여럿이 갔는데. 지금도 믿지 못하겠는게 여럿이 갔으니 목욕비를 깎아 달라고 해서 그 돈으로 떡뽁이를 사 먹은 기억이 난다. 참 그때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아이들의 생떼를 들어 준 마음 좋은 주인도 있었나보다.
아마 이 책은 어린이들도 좋아하겠지만 어른들도 더 좋아할 수 있는 그림책인 것 같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같이,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 따뜻했던 기억을 되살려 보며 미소지을 수 있는 타임캡슐같은 정겨운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나도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속에 몸을 푹 담그고 냉탕쪽을 바라보며 선녀 할머니가 어디 계신가, 몰래몰래 찾아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