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꽃 피면
작약꽃을 기다렸어요
나비와 흙과 무결한 공기와 나는
작약 옆에서
기어 돌며 누우며
관음보살이여
성모여
부르며
작약꽃 피면
그곳에
나의 큰 바다가
맑고 부드러운 전심(全心)이
소금 아끼듯 작약꽃 보면
아픈 몸 곧 나을 듯이
누군가 만날 의욕도 다시 생겨날 듯이
모레에
어쩌면 그보다 일찍
믿음처럼
작약꽃 피면 (P.12)
잎사귀에 여름비가 올 때
잎사귀에 빗방울이 떨어지네
나의 여름이 떨어지네
빗방울의 심장이 뛰네
바라춤을 추네
산록(山綠)이 비치네
빗방울 속엔
천둥이 굵은 저음으로 우네
몰랑한 너와 내가 있네
잎사귀는 푸른 지면(紙面)
너에게 여름 편지를 쓰네 (P.18)
귤꽃이 피는 동안
귤밭에
소금 같은 귤꽃이 피어
향기를 나눠주네
돌에게
새에게
무쇠솥같은 낮에게
밤하늘에
그리고
내 일기(日記) 위에
귤꽃 향기를
마당 빨랫줄에 하얀 천으로 널고
귤꽃 향기를
홑겹 이불로 덮고
요로 깔고
귤꽃 향기처럼
나는
무엇에든
조용하게 은은하게
일어나고 (P.23)
오월의 무화과나무 밭에서
무화과나무 가지에 넓은 잎들이 달렸네
열매도 엄지만하게 열렸네
작년에 따지 않은 무화과 열매는 쪼그라들어 올해에도 매
달려 있네
잎사귀의 그림자는 아랫가지의 푸른 잎사귀 위에 얹히네
바람이 오면 무화과나무는 그늘을 움직이네
이 연한 그늘은 올봄에 새로 생겨난 것이라네
나는 풀 뽑고 돌 캐다 움직이는 그늘 속으로 들어가 땀
을 식히네
옛사람인 내 몸에서 무화과 잎사귀 냄새가 나네 (P.35)
가방
나는 이 가방을 오래 메고 다녔어
가방 속엔
바닷가와 흰 목덜미의 파도
재수록한 시
그날의 마지막 석양빛
이별의 낙수(落水) 소리
백합과 접힌 나비
건강한 해바라기
맞은편에 마른 잎
어제의 귀뜸
나를 부축하던 약속
희락의 첫 눈송이
물풍선 같은 슬픔
오늘은 당신이 메고 가는군
해변을 걸어가는군
가방 속에
파도치는 나를 넣고서 (P.40)
아침에 눈을 뜨면 깨끗하고 무구한 모습의 하루가 나를 반기는 데, 눈 돌리는 데마다 시끄러운
소식들에 공연히 평화롭지 않네. 지난 4月의 첫 작약은 크림 작약인 두체스 작약들과 지냈는데 어제 온 사라 작약들은 화병에 꽂으면 너무나 급히 활짝 피어나는 특성과 달리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꽃잎을 열 생각 없이 컨디셔닝으로 잎사귀를 정리한 모습이 츄파춥스같이 귀엽기만 해 "너희들은 왜 꽃잎을 열 생각을 안 하느냐, 어서 꽃을 보여 줘야지" 핀잔을 주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건 급한 내 마음이지 꽃의 마음은 아니잖나. 꽃 피는 건 꽃 마음이지. 한 밤 자고 약간 봉실해진 작약들을 보며 미안해진 마음에 반성. 그래도 문태준 詩人의 제주에서의 무해하고, 풀 같고 반딧불이 같고 청량한 '고요의 풍경'들 같은 아름답고 깨끗한 詩들 덕분에 못나고 흩어진 마음들을 바람으로 쓸고 닦으며 시작하는 오월 끄트머리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