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박주가리꽃 몇 송이 꺾어 들고 가는데
나비 한 마리 앉았다
꽃다발 무거워졌다
내 맘 휘어잡고 한참을 가다
나비 날아갔는데
꽃다발 여전히 무겁다
휘발하여 얼룩으로 남은 인연들
휘발하여 얼룩으로 남은 인연들
활활활활 앉아 있다 (P.44 )
본색 생각
동백꽃 곱던 손수건이 볕에 바래니
그제야 수건같이 빛바랜 세월의 얼굴이
오히려 사람 냄새 짙다
닳고 닳아야 선명해지는 본디 빛깔
얼룩덜룩한 나는
한참을 더 바래야 할 파랑과 너울 사이 (P.55 )
사과는 빨갛지 않다
사과의빨강빛 개나리와 노란빛 소나무의초록빛 바다의
쪽빛
저 고운 빛깔들이 제가 거부한 빛깔이라니
안지 못하고 밀어낸 빛깔이 제 모습이란다
싫은 색으로 평생을 사는 거다
평생도 모자라 가계를 잇는다
역설과 모순의 빛깔 위에 햇살이 내려와 눈부시다
나를 보라로 알고 가까워진 사람
주홍이라 믿고 내가 다가간 그 사람
오목거울처럼 거꾸로의 모습을 서로 본 거다
허상도 고루 빛을 받는다
헛것에서 싹이 돋고 꽃이 핀다
사과의 맘속엔 주황노랑초록파랑남색보라가 들어 있
겠다
내 속엔 그가 미쳐 읽지 못한 모든 색깔이 들어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안간힘으로
보이는 것들을 껴안고 있다 (P.65 )
꼬리
평사리문학관 백구 사리가
날 언제 봤다고
꼬리를 살랑살랑 좌우로 흔듭니다
밥 주는 성자씨 다가오자
꼬리를 삼백육십 도로 흔듭니다
숨길 것도 포장할 것도 없이 보여주는
꼬리가 내겐 없습니다 (P.87 )
-나혜경 詩集, <미스김라일락>-에서
뜬금없이 봄도 아닌데, 더구나 늦가을이 지쳐 겨울로 가는데
문득, 어디선가 받았었던 꽃다발들이 나도 무거워졌다.
아직은 휘발하지는 못했지만 얼룩으로 남은 인연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스스로가 얼룩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그런 인연들의 꽃다발들로 한층 더 무거워진 그런 연말.
문득, 평사리문학관 백구 사리처럼, 꼬리를 좌우로 살랑살랑
다정하게 흔들고 싶다.
내가 아는 사람보다 더 명석한 개, 순구도 보고 싶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