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빚는 저녁

 

 

 

 

 

      너에게 가는 두근거리는 악보다

 

 

      홍두깨 대신 소주병으로 꽁꽁 뭉친 구름을 밀어보자

      아니 저것은 눈덩이고

      하룻밤의 약속이었던 것

 

 

      끈끈히 달라붙는 저녁을 떼어내면서

      수년 전 어느 외진 마을의 흐느낌을 밀가루 반죽에 밀어

      넣는다

      눈이 날리다 그쳤다 한다

 

 

      한 여자의 무거운 밤이 날아가 언 강에 떨어진다

      그걸 받아 결심한 강이 쩌렁쩌렁 울린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두께로 눈앞의 생이 초설처럼 웃

      는 곳

      말랑거리는 구름의 속삭임과 오래 뒤척여 납작해진 밤의

      표정이 뒤섞여

      노래의 흰 뿌리들이 풀려 나온다

      잘게 썰어 반듯해진 마음의 다발들

 

 

      후루룩거리며 남자가 먹는 건

      한 여자의 븕은 벼랑으로 빚은 나직한 평화

 

 

      너에게 닿아 끓고 있는 밤이 오래도록 저물지 않는다  (P.90 )

 

 

 

 

 

 

         농성장

 

 

 

 

 

      시청 앞이 발생한다 어둠이 있어 눈 밝은 문장이 지나가

      고 툭툭 끊어지는 쉼표는 고독의 방식을 고수한다 저곳은

      너무 환하여 어두운 바깥이다 나는 시청 앞을 외투처럼 입

      고 겨울 밖으로 재치기와 함께 튀어 나간다 재채기는 바닥에

      깔아놓은 바닥을 완성한다 잘 찢어지는 어제의 햇볕이거나

      엉덩이 밑에서 새로 태어나는 차가운 행성이다 붉은 띠를

      두른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태양이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꽃

      잎으로 떨어진다 길 가는 사람은 길 안에 있지 않아서 어

      제 저녁 잃어버린 핸드폰 같다 어디선가 혼자 울고 있거

      나 혼자 걸어가는 가로등이다 너무 선명하여 잘 보이지 않

      는 색깔이거나 너무 커서 잘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앉아 있

      다 밤의 외연은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동쪽 가시나무 끝에

      서 사라지고 지워지는 것이어서 오늘도 땅속을 기어가던 목

      소리들은 붉고 뜨거운 끈으로 광장을 묶고 있다 비로소 얼

      굴이 태어났나 비로소 오늘이 만들어져 오늘이 되었나 시

      청 앞이 발생한다  (P.109 )

 

 

 

 

 

 

           북극 거미

 

 

 

 

 

        사과가 붉은 것은 햇볕의 농담이라고 말하는 순간 내손은

        순록의 뿔이 된다 다 안다는 듯 아이가 물방울처럼 웃는다

 

 

        전화번호를 지우고 주소를 지우고 마지막 저녁의 표정도

        지운다

        새롭게 얼굴을 내민 아침의 각도가 거미줄에 걸려 있다

        거미줄에서 부서지던 햇살들이 폭설로 흩날리던 밤에 나는

        공중의 혈맥을 더듬던 금빛 거미를 찾는다

 

 

        어제 살았던 아침을 껍질이 벗겨질 때까지 씻어내다가 어

        느덧 나는 국경의 눈보라가 된다 열두 시간 전에 이국의

        골목에서 듣던 노래였다

 

 

        사라진 손으로 귀에 도착하지 않은 북극의 물소리를 만지

        는 밤

 

 

        툰드라의 측백나무로 서서 여자의 몸에서 자라는 달을

        본다

 

 

        나는 들개 울음소리가 들리는 밤의 중심에서 밤을 포획하

        는 금빛거미를 찾는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손을 잡고 눈

        먼 남자가 천천히 걸어온다 검은 남자의 수 세기를 지나 베

        링해의 어두운 해안에 닿는 저녁

 

 

        내 안의 거미가 긴 다리를 뻗어 얼음 같은 그믐달을 잘게

        씹어 먹는다  (P.24 )

 

 

 

 

 

 

             - 홍일표 詩集, <밀서>-에서

 

     

 

   

 

 

 

 

 

 

                                                     

 

문예중앙시선 40권. 홍일표 시집. 시인은 이전 시집 <매혹의 지도>에서, 눈앞에 보이는 대상과 그 대상에서 촉발된 상상 속 '이면의 무늬'를 시 속에 부려놓으며, 감각과 수사와 서정이 경계 없이 펼쳐지는 '매혹의 지도'를 펼쳐 보였다. 3년 만에 펴내는 세 번째 시집 <밀서>에서도, 세상의 존재들에 대해 고유한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시간과 대상, 존재와 자아를 빨아들이는 저 '검은' 공간,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는, 외롭고 쓸쓸한 고투를 펼쳐나간다.

"사물의 지루한 정면을 부수어 강을 건너고 산을 넘는", 그곳에는 비록 "벼락과 질풍노도가 있으며, 광기와 혼돈이" 가득할지라도, 시인은 그가 고안해내는 특유의 시적 발화로써 저 깊고 낯선 공간, 광막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저 광막한 미지의 영역으로의 여행은 "존재와 시간을 달리 보려는, 시라는 이름의 또 다른 희망이며, 존재의 이유를 죽음의 내부에서 찾아 나선 한 시인이, 이 세계와 자연을 주시하면서 고안해낸 고유한 실존의 색깔"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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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10-31 05:23   좋아요 0 | URL
우리가 눈을 감아도 모두 다 볼 수 있는 줄 안다면
마음으로 서로 읽고 헤아리면서
즐거이 노래를 부를 수 있으리라 느껴요

appletreeje 2015-11-01 22:32   좋아요 1 | URL
예~ 마음으로 서로 생각하며 아끼고 헤아린다면
언제나 즐거운 마음노래를 부를 수 있겠지요~^^

달걀부인 2015-10-31 06:51   좋아요 0 | URL
시...너무너무 좋네요.

appletreeje 2015-11-01 22:3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달걀부인님~~^^

2015-10-31 1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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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2 0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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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31 14: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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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1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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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31 18: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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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1 2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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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3 1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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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3 2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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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3 21: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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