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사듯이 정기적으로 사과를 산다. 열흘에 한 번 쌀 4킬로그램을 사듯이, 사과를 2분의 1 상자 혹은 한 판을 산다. 배를 사러 갔다가, 자몽을 사러 갔다가, 키위를 사러 갔다가, "이 사과는 어디 사과예요? 얼마예요?" 하고 묻고 만다. 다른 과일들은 냉장고 속에 있음을 위주로 생각하는데, 사과는 없음으로 인지한다. '참, 사과가 떨어졌지.....' 이런 식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물 한 잔과 사과 반쪽을 먹고 하루를 시작한다. 잠이 덜 깬 육체에 사과의 차가움, 사과의 단단함, 사과의 달콤함을 투여한다. 그러면 육체는 매번 사과의 진지함에 놀라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받아들인다. 그렇군, 어쩔 수 없지,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 사과에 의해 깨어난 몸은 다시 모이고 작동하고 느끼기 시작한다.
사과에 대한 최초의 강렬한 기억은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나보다 책을 많이 읽고, 당시 내 눈에는 데미안처럼 보인 반 친구가 어느날 아파서 결석했다. 서로를 의식하기만 하던 그 친구를 찾아갔던 것은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용기의 표출이었다. 나는 병문안에 어울리지도 않게 무턱대고 사과를 사 가지고 갔다. 독감으로 친구는 혼자 누워 있었고 부모님은 장사를 하러 나가신 상태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가지고 간 사과로 차를 끓였다. 사과 향이 퍼지던 집 안, 주전자에서 끓던 물소리, 한참을 그 낯선 공간에 서 있던 느낌, 그런 것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친구와는 중학 시절 내내 특별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친구보다 사과가 더 특별했나 보다. 이후 나의 양식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사과의 주기로 1년을 생각하는 버룻이 들었다. 늦여름 8월 하순, 아직은 더위가 한창일 때 조생종인 아오리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시장 귀퉁이에서 초록빛 아오리를 보면 해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바로 한 봉 사 와서 한 해의 첫 사과를 음미한다. 한 줄기 새벽 여명의 맛이다. 그렇게 몇 번 아오리를 사 들고 귀가하다 보면 얼마 안 가 그 초록빛을 밀어내며 붉은색 사과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한다. 바로 홍로나 홍옥, 양광, 시나노 스위트 들이다. 골목과 거리는 이 불타오르는 사과들로 채워진다. 9월에서 11월에 이르는 기간은 온갖 고혹적이고 맹렬한 사과 때문에 현기증이 일어나기까지 한다. 홍옥의 거의 악마적인 붉은색이나 시나노의 뇌를 얼얼하게 만드는 깊고 치명적인 단맛은 장렬하기만 하다. 또한 그들과 다른 매력으로 겨울에 먹는 찬 부사는 언제나 생의 염결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 신맛과 단맛의 비율과 치밀도가 만들어내는 사과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에 매번 감동하느라 생활은 지루할 틈이 없다.
사과에 대한 시를 몇 번 썼지만, 아직도 사과에의 현혹을 보여주기는 미흡한 것들이다. 그중 <사과나무>라는 시가 있다.
어제를 살해한 오늘의 태양처럼 빛나고 향기 나는 사과들
사과는 사과나무를 불태운다. 사과나무는 아름답다.
이렇게 끝맺는 이 시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데, 어쩐지 오늘은 좀 슬프게만 여겨진다. 너무 아름다운 것들은 슬픔을 감추려 하지 않나 보다. (P.20~22 ) / 이수명 [사과]
-<당신의 사물들>에서-
사과처럼
사과를 사랑하자
사과처럼 사각사각 아이를 낳았다
사과와 속삭이자 사과 냄새가 났다
잠속에서도 사과 냄새는 휘발되지 않아
누가 사과처럼 날 따 버린거야
반복되는 태초의 연습
이 넓은 지구에다 아이들을 툭툭 떨어뜨리는 사과의 엄마들
어두워도 여긴 사과의 우주
내일이 와도 사과는 날 놓아주지 않아
뱀과 여전히 헤어지지 않아
조그만 아이들이 새카만 사과씨를 품고 지구에서 자란다
사과처럼 구르면서 사과의 발자국을 찍는다
사과가 사람을 홀리던 그때의 사과처럼
어린 사과에게 남은 태초가
사과처럼 다가오고 있다 (P.52 )
사과보다 더 많아
사과 저 편은 붉다
노을이야
사과나무는 하나인데
사과는 너무 많아
나무 안쪽으로 흐르고 있는 사과로부터 안 보이게 굴러
간 사과들까지
어쩌자고 시인은 시를 사과라 부르고
그 많은 사과들 틈에 끼어 내장이 하얀 시를 쓰고 있나
첫사랑은 새파랗게 지나갔고
나무 왼뺨에 흩날리던 사과꽃은
여름 내내 사과가 되었지만
시인은
깜깜한 가지 사이로
우두커니 서서 시를 놓친다
밤새 쓰다 만 노트 위에 툭툭 떨어진 사과
사과 아래 그 아래
공허한 문장들
나무는 하나인데
사과는 너무 많아
사과보다 시가 더 많아
사과처럼 떨어지는 재앙조차 갖지 못해 (P.60 )
-최문자 詩集, <파의 목소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