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나무와 사과
또 성급한 판단으로 천백만 원을 날렸다
호락호락하지 않아 면밀하지 않으면
게걸음이라구 단호하게 혹들을 떼어버리라니까
성급한 내 사랑들을 생각했다
내가 물어야 할 사랑의 위약금들이 쌓여갔고
나와 맺은 나의 계약은 지속적으로 유보되고 있었다
산자락에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보았다
햇살을 받은 사과알들이
나무와 바닥을 점령한 수많은 사과알들이
매달린 채 혹은 떨어진 채
아스팔트와 한 무리의 잠자리 떼와 산 하나를 통채로
빨강 속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잠시,
바람 한 점 없이 황홀했다
나무의 심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에게 매달린 혹은 질펀하게 떨어진 나와 내 사랑들을
볼품없이 사랑하기로 했다 벌레 먹은 채
황홀하기로 했다 (P.28 )
-김명철 詩集, <바람의 기원>-에서
실천시선 235권. 200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짧게, 카운터펀치>를 펴낸 김명철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일상의 풍경을 포착하는 예리한 시선과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어법을 가진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삶의 불안과 고독을 긴장감 있는 언어로 밀도 있게 응축해냈다. 시인은 섬세한 시선으로 우리 삶의 모습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다양한 사건과 풍경들을 감각적인 언어로 빚어낸다.
지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늘 내 사랑도 성급한 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역시 내가 물어야 할 사랑의 위약금들이 쌓여갔고,
나와 맺은 나의 계약도 유보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나무의 심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에게 매달린 혹은 질펀하게 떨어진 나와 내 사랑들을, 더욱 볼품없이 사랑하기로 했다
요즘 더욱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