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자막이 사라질 때까지
생을 긍정하는 고갯짓 2001년『사람의 문학』등단 이후, 시집『기차를 놓치다』와 산문집『그대라는 문장』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손세실리아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의 시선은 늘 서럽고 애달픈 것들을 향해 있다. 기계적인 현실 속에서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 분주하게 날갯짓하는 새처럼 시인의 말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아파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오지랖 넓게 보듬는 엄마 품과 닮았다.
서럽고 아픈 것들을 가만히 만지다시집「꿈결에 시를 베다」에는 발목 잘린 유기견, 삐걱거리는 테이블, 구걸하는 캄보디아 소년, 다문화 가정, 어머니 등 다양한 대상들이 등장한다. 세상의 주역이 아닌 변두리에서 서성거리고 버려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른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그저 연민에 겨운 감정 놀이의 산물로써 시의 형식만 입고 있는 것일까? 시집의 발문을 쓴 미술가 임옥상의 말을 빌리자면 “시인은 연민만 갖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서 희망을 보고 시인 스스로도 위로를 받는다.” 손세실리아 시인은 대상들을 주전부리 우물거리듯 아무렇게나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 작품 속 화자들은 작고 나약한 것들의 울먹임을 내치지 못하는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에 지친 대상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는 순간, 시상으로 곰삭아지는 과정을 거친다.
구수하게 곰삭은 시상은 투명한 젤리처럼 응고되어 불우하지 않은 몸, 하지만 마음이 허하여 제 이웃을 볼 줄 모르는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시인은 아마도 이 세상에 존중받지 못해 슬퍼하고 있을 존재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습관을 지녔을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온 뼘”이 되지 못한 “반 뼘”들을 위해 언제나 조근조근 위안하는 법을 곰곰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마석가구공단 뒤켠 쪽방촌 어귀엔 무슨 무슨
마트라는 한글 상호 하단에
siekya라 써넣은 상점이 있다
전자사전은 물론이거니와 네이버 지식인에도
올라있지 않은 국적불명의 이 영단어에는
이주노동자들의 신산한 삶이 배어 있다는데
말하긴 뭣하지만 이 새끼 저 새끼
망할 놈의 새끼… 할 때의 영문표기란다
가게 주인의 상투적인 말투를 Hi쯤으로 알고
딴엔 멋진 한국식 인사...
엔딩 자막이 사라질 때까지
생을 긍정하는 고갯짓
2001년『사람의 문학』등단 이후, 시집『기차를 놓치다』와 산문집『그대라는 문장』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손세실리아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의 시선은 늘 서럽고 애달픈 것들을 향해 있다. 기계적인 현실 속에서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 분주하게 날갯짓하는 새처럼 시인의 말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아파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오지랖 넓게 보듬는 엄마 품과 닮았다.
서럽고 아픈 것들을 가만히 만지다시집「꿈결에 시를 베다」에는 발목 잘린 유기견, 삐걱거리는 테이블, 구걸하는 캄보디아 소년, 다문화 가정, 어머니 등 다양한 대상들이 등장한다. 세상의 주역이 아닌 변두리에서 서성거리고 버려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른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그저 연민에 겨운 감정 놀이의 산물로써 시의 형식만 입고 있는 것일까? 시집의 발문을 쓴 미술가 임옥상의 말을 빌리자면 “시인은 연민만 갖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서 희망을 보고 시인 스스로도 위로를 받는다.” 손세실리아 시인은 대상들을 주전부리 우물거리듯 아무렇게나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 작품 속 화자들은 작고 나약한 것들의 울먹임을 내치지 못하는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에 지친 대상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는 순간, 시상으로 곰삭아지는 과정을 거친다.
구수하게 곰삭은 시상은 투명한 젤리처럼 응고되어 불우하지 않은 몸, 하지만 마음이 허하여 제 이웃을 볼 줄 모르는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시인은 아마도 이 세상에 존중받지 못해 슬퍼하고 있을 존재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습관을 지녔을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온 뼘”이 되지 못한 “반 뼘”들을 위해 언제나 조근조근 위안하는 법을 곰곰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시를 읽을 때.. 어떤 경험이 겹치는 순간, 더욱 시에 쏠리는 마음이다.
해마다 새해 첫날 새벽산을 인적 없는 산길을 걸어가다 보면 땅과 발의
일치로 너무나 편하게 걷게 해주는 내 오래된 등산화에게 고마움이 불쑥
솟아난다. 흙과 돌멩이와 낙엽길과 눈길과 능선을 잠시 페달을 밟지 않아도
바퀴의 탄성으로 굴러가는 자전거처럼 내 몸이 알아서 걸어가게 해주는 나의
등산화. 얼마나 많은 時間과 많은 산과 길을 발을 감싸안고 몸을 싣고 다녔던
내 낡은 등산화에게 새해 첫 감사의 인사를 건넸던 기억이 났다. '우주의 신발'
을 읽으며. 그리고 그 우주의 얼음 발에 신겨진 신발,같은 우리의 몸에 대한
생각도 해보며. 내 등산화는 몇 켤레째인가, 떠올려보니 음...한 여섯 켤레쯤
되는구나. 그중 15년을 가장 오래 함께 했던 빨간 코오롱 등산화의 노고는 늘
잊지 못하고 있다. 그후 어떤 새 등산화도 그렇게 편안한 신발은 다시 만나지
못해서 더욱 늘 마음이 애석하다.
'죽기전에 한번쯤은 뒤축으로 땅바닥을 질질 끌며 못도 쾅쾅 박으며/ 지치도록
걷고 싶은 나의 신발,'이라는 황원교 시인의 '오래된 신발'도 생각나고.
열대어를 다시 키웠을 때, 맨 처음 물고기는 블루베타였는데 몸색깔이 마치
잉크색처럼 파래서 '잉크'라고 이름지은 놈이 있었다. 동그란 어항에서 혼자
있는 것이 안타깝고 외로워보여, 베타 특성상 다른 물고기와의 합사를 금하고
있어도 그래도 다른 두 마리의 베타들을 넣어 주었는데, 보자마자 서로들 달려들어
싸우더니 다음날 아침에 보니..새로 온 베타들이 다 죽었다. 녀석은 그렇게 혼자도
잘 살더니 한 이 년쯤 있다가 죽었는데 너무나 정이 많이 들어 차마 버리지는 못해
큰 파키라나무 밑에 묻어 준 생각도 나고.
'무리지어 다니는게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이라는 귀절을 읽고, 수조에 다가가
우리집 물고기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다행이 수족관이 아니라 그런지...얘들은
발랄하고 즐겁게 잘 무리지어 노는것처럼 보여 왠지 안심이다.
언젠가, 지금처럼 수능을 앞두고 있던 어느 시절에 백병원 병자성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차안...어떤 분이 "신부님! 우리 000 시험 잘봐서 꼭 대학합격하라고
기도좀 해주세요!" 이야기를 하자, 지금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회장이신 애기
신부님이 "저 그런 기도는 못해요. 다 열심히 공부했는데요." 하시자 또 그분께서
"그래도 우리 000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말씀하셨다. 봉고차 핸들을 쥐고 운전하
시던 신부님이 " 어떻게 다 대학가서 공부만 해요. 다들 공부만 하면 나무는 누가
심고 길은 누가 닦어요." 하시는데,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내가 "나무는 우리 애가
심을께요."라고 중얼거렸던 생각이 또 난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던
지 묘연하다.
대학이라는 곳을 가기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공부했던 모든 수험생들, 그간 공부한
노고 최선을 다하기를 바랄뿐이다. 에고,
이제 내일이면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나무를 심을 아이의 생일이기도 하다.
무엇이 되어 살든 우리 모두,
'잘 영근 나락 가마니 공평하게 나눠/ 집으로 향하는 지아비의 당당한 걸음입니다/
고봉밥 차려내는 어미의 분주한 손길입니다/ 아이가 푸지게 눈 황금빛 똥이며/ 그 똥
거름 삼아 이듬해 피어나는 갯메꽃입니다'처럼 사람답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