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신경림
다리가 되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스스로 다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등을 타고 어깨를 밟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늘 서럽다
왜 스스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만 건네주는 것일까
깨고 나면 나는 더 억울해지지만
이윽고 꿈에서나마 선선히
다리가 되어주지 못한 일이 서글퍼진다 (P.14 )
어떤 품앗이
박성우
구복리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한천댁과 청동댁이 구복리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구년 뒤, 한천양반이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청동댁이 한천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다시 십일년 뒤, 청동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한천댁이 청동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고들 했다
자식새끼들 후다닥 왔다 후다닥 가는 명절 뒤 밤에도
이 별스런 품앗이는 소쩍새 울음처럼 이어지곤 하는데
구복리댁은 울 큰어매고 청동댁은 내 친구 수영이 어매고
한천댁은 울 어매다 (P.92 )
꽃들
문태준
모스끄바 거리에는 꽃집이 유난히 많았다
스물네시간 꽃을 판다고 했다
꽃집마다 '꽃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고 순한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꽃들'이라는 말의 둘레라면
세상의 어떤 꽃인들 피지 못하겠는가
그 말은 은하수처럼 크고 찬찬한 말씨여서
'꽃들'이라는 이름의 꽃가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야생의 언덕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내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을 두루 덮히듯이
밥 먹어라, 부르는 목소리가 저녁연기 사이로 퍼져나가 듯이
그리하여 어린꽃들이
밥상머리에 모두 둘러앉는 것을 보았다 (P.98 )
다정함의 세계
김행숙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영원히 이곳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P.122 )
와유臥遊
안현미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난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도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
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P.146 )
좋겠다
고운기
저물 무렵
먼 도시의 번호판을 단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빠져나간다
가는 동안 밤을 맞더라도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좋겠다
버스를 탄 사람 몇이 먼 도시의 눈빛처럼 보이는데
손님 드문 텅 빈 버스처럼 흐린 눈빛이라도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좋겠다
집에는 옛날의 숟가락이 소담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P.152 )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P.190 )
-곽효환의 시가 있는 아침,<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에서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 P.11 )
숫겨울
가스와 기름불로 덥힌 난방
두껍게 껴입고도 마음 추워오는 날
부뚜막 온기 불쑥 그립다
쭈그려 앉은 엄니가 하염없이 넣어주는
잘 마른 나무줄기와 이파리 꾸역꾸역
받아 삼키던 아궁이의 깨끗한 식욕
밤새 차가워진 온돌의 몸을 데웠지
잘 마른 나무일수록 연기의 향과 결이 고왔지
삶의 나중도 그러하리라
수평의 물을 수직으로 끌어올려 살았던 나무들
불 만나 재로 남은 것은 밭으로 갔고
영혼은 연기로 날아올라 산으로 갔지 (P.22 )
약속
자주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리
하늘엔 갑자기 생겨난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겠지.
가장 일찍 떠서 가장 늦게 질
하늘의 아이들아,
욕된 이름들이 지상을 떠날 때까지
그들을 잊지 말고 굽어보고 지켜보렴.
흐르지 못한 시간들이
쌓이고 고여서 썩어가는
골목과 거리와 집과 강물과 늪에
너희 아픈 빛을 오래오래 비추어다오
폐허의 가슴에
떠나버린 사랑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약속을 되새기리.
자주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리. (P.33 )
나는 그 노인들이 싫어졌다
한 나라의 지혜여야 할 어른을
누가 물정 모르는 맹견으로 만들었나
왕년을 들먹이는, 고장 난 기계와 같은 무지와 고집
나라 없는 설움과 고엽제의 세월과
목숨의 최전선을 살아오면서
평생을 체제 동원에 길들여온 과거들
나는 왜 미워지는 것일까
팔뚝에 큐피드 문신을 하고
애틋한 사랑 대신 단순 구호를 복창하는
늙은 과거들은 알까 일당 만 원에 팔려 와
목에 핏대 세우는 무지막지가
어린 현재와 미래의 평화 가로막는다는 것을
억울하게 징집당해온 세월을 배설물처럼 쏟아내는
뼛속까지 노예가 배어 있는 과거들
노인들이 싫어졌다
이러면 안되는데
따지고 보면 저이들도 피해자인데
나도 곧 저들 속에 포함될 나이인데
아무리 고쳐 생각을 해도
해병대 군복에 도끼눈 부릅뜬 채
가스통 들러업은 저들을 보면
오만 정 떨어져 멀리 피하고만 싶다
그러면 안 되는데 되뇌면서도
나는 그들이 한없이 미워지고 싫어졌다 (P.46 )
달을 안주로 술을 마시다
그해 여름 여명에 나는 해안가 낯선 주막 열린 문을 통해
기이한 풍경 하나를 우연히 일별하게 되었다 온몸에 진흙
범벅을 한 채, 때마침 떠오르는 햇살에 쫓겨 갯벌 빠져나와
궁한 몸짓으로 줄행랑치는 하현을 보았던 것인데 에로 비
디오가 따로 없었다
토박이 주모의 말에 의하면 주마에 홀린 우리 일행이 술
청 동이에 가득 담긴 술을 한 잔 한 잔 퍼 올려 각자의 몸속
에 옮겨 담고 있는 동안 초저녁, 부두가 거처인 도둑고양이
처럼 기어든 달이 새벽까지 갯벌을 들쑤시고 다니며 제 씨
앗 마구 뿌려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밤새 통음하며 먹어치운 안주 일색이
실인즉슨 달의 새끼들이나 진배없다는 거였다 (P.102 )
-이재무 詩集,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에서
어느덧, 9월의 첫 주가 흘러가고 다음주는 추석이 올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추석이 오고 있지만
가을이되 가을걷이가 없는 허수아비의 빈 손 같은, 그런 허전하고
무겁기만 한 시간들이다. 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참으로 혼미할
뿐이다. 이놈의 세상이. 남의 아픔이라고 함부로 입질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난도질까지 서슴치않고 해대는 인간군상들이 치가
떨리고 한없이 마음이 무겁고 무겁기만 한 시간이다.
아마 이번 추석연휴에는, 쓰디 쓴 술만 더 많이 마실 것 같다.
우리 제발...좀 사람답게좀 살자.
이웃분들 모두 평안한 추석명절 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