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糊口)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P.10 )
고스톱 치는 순서는 왜 왼쪽인가
우리 고모, 하루종일 노인정에 나가 고스톱을 치지요
"이게 치매 예방에 그렇게 좋다네." 그놈의 예방주사 부작
용으로 좌골신경통과 오십견이 왔어도 우리 고모, 못 먹어
도 고지요 고모부는 건영아파트 105동 입구에서 이교대로
시간을 지키고 있고 세 아들은 명절에만 오지요 달팽이처
럼 똬리를 틀고 앉아서 우리 고모, 동네 할머니들에게 점
십짜리 운명을 배당하지요 늙은 닌자가 헌 표창 날리듯 오
른쪽에서 왼쪽으로 날아가 꽂히는 붉은 서표(書標)들, 신음
할 새도 없이 광박이나 피박을 쓰고 엎드리는 노인들은 오
늘도 0.1도쯤 허리가 기울었지요 달팽이잡이뱀은 달팽이
잡이 오른돌이, 그러니까 시계 방향으로 자란 것만 먹는다
지요 오른쪽에 이가 열두개 정도 더 나 있어서, 오른돌이만
잡아낸다지요 그 열둘이야말로 시간을 말하는 숫자들이지
요 시간을 따라가면 죽음과 마주치게 된다는 뜻, 그래서 고
스톱 치는 순서가 왼돌이일 거예요 우리 고모, 동네 할머니
들과 힘을 합쳐 시간에 저항하고 있는 거지요 (P.11 )
도봉근린공원
얼굴을 썬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면
인생이 무장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계적응훈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한 지 몇년인데, 지갑은 집에 두고 왔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윽박지르듯 지나쳐 간다
철봉 옆에는 허공을 걷는 사내들과
앉아서 제 몸을 들어 올리는 사내들이 있다 몇 갑자
내공을 들 쳐 메고 무협지 밖으로 걸어나온 자들이다
애먼 나무둥치에 몸을 비비는 저편 부부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을 닮았다
영역 표시를 해놓는 거다
신문지 위에 소주와 순대를 진설한 노인은
지금 막 주지육림에 들었다
개울물이 포석정처럼 노인을 중심으로 돈다
약수터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는 예쁘고
헤픈 처녀 같아서 뭇입이 지나간 참이다
나도 머뭇거리며 손잡이 쪽에 얼굴을 가져간다
제일 많이 혀를 탄 곳이다 방금 나는
웬 노파와 입을 맞췄다
맨발 지압로에는 볼일 급한 애완견이 먼저 지나갔고
음이온 산책로에는 보행기를 끄는 고목이 서 있으니
놀랍도다, 이 저녁의 평화는 왜 이리 분주한 것이며
요즈음의 태평성대는 왜 이리 쓸쓸한 것이냐 (P.17 )
할머니가 익어간다
청국장은 고구려 전사의 의 음식이라고 한다 짚으로 만든
주머니에 콩을 담아 안장 아래 두면 콩이 발효된다 말의 체
온은 42도, 달리지 않아도 이미 숨가쁘다 들숨과 날숨 사이
에서 노랗게 굳은 요구르트다 장판 아래로 번지는 파문이
다 거기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계
신다 자잘한 콩들처럼 바글거리는 어머니......들
아랫목에서 익어가는 청국장 냄새를 할머니 냄새라 말하
지 마라
저승, 그 미지의 땅을 정복하러 가는 전사의 비상식량이다 (P.45 )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장마차 가본 게 언제인가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견디고 있을 것이다
크기에 빗댄다면
대합탕 옆에 놓인 소주잔 같을 것이다
방점처럼, 사랑하는 이 옆에서
그이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바로 그 마음처럼
참이슬은 조각난 조개의 조변석개를 안타까워할 것이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는 들큼한 취객의 등이다
당신도 오래 견딘 것인가
소주병의 푸른 빛이 비상구로 보이는가
옆을 힐끗거리며
나는 일편단심 오리지널이야,
프레쉬라니, 저렇게 푸르다니, 풋, 이러면서
그리움에도 등급을 매기는 나라가
저 새벽의 천변에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지만 혼자서는 끝내 가지 않을
혼자라서 끝내 갈 수 없는 나라가
저 피안에서 취객의 등처럼 깜빡이고 있을 것이다 (P.67 )
-권혁웅 詩集, <애인은 토막난 순대처럼 운다>-에서
일상의 이면을 꼬집는 통찰, 유머로 넘어서는 현실의 비애
미당문학상을 수상하고 ‘미래파’ 논쟁을 주도했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권혁웅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가 출간되었다. 시대 풍자의 묘미를 보여준 『소문들』(2010)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인간들이 어울려 지지고 볶는”(오연경, 해설) 삶의 현장을 조망하는 명료한 시선과 풍부한 감수성으로 일상의 다채로운 풍경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 감각과 사유의 기반을 ‘세속의 자리’에 두고서 “일상성을 뒤집는 섬뜩한 인식과 능청스러운 해학”(김기택 시인)으로 일상의 풍경 속에서 삶의 세목을 짚어내는 예민한 통찰력과 세밀한 묘사력이 돋보이는 시편들이 슬픔과 유머를 동반하며 잔잔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미당문학상(2012) 수상작 '봄밤'을 비롯하여 모두 59편의 시를 수록하였다.
권혁웅 시인은 매 시집마다 참신한 면모를 보여주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시도해왔다. 패러디, 연애시, 정치풍자시를 거쳐 최근의 일상시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과 언어를 탐구하며 완숙한 개성으로 시세계의 영역을 넓혀온 시인은 우리가 무심결에 놓쳐버리기 쉬운 “수많은 사람/사물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서 우리 앞에 쓱 밀어놓는다.” 서정성과 실험성을 아우르는 발랄한 기지와 일상의 현실 속에서 포착한 소재를 형상화하는 놀라운 솜씨뿐만 아니라 빼어난 언어 감각과 상상력,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춘 이 시인을 “명석한 시인”(신형철, 추천사)이라 부른다 해도 과찬의 말은 아닐 것이다.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호구(糊口)'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