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의 꿈
그 어느날
깊은 잠에서 깨어나 먼 산을 바라보면
하늘의 불과 바람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되고 싶다.
사람들은 다 나간 텅 빈 굿판에서
가지마다 무성한 부채를 들고
이승에서의 허물 헌옷인 양 벗어던지며
두 팔 높이 들어 살풀이춤을 추는
은행나무.
이따금 멧비둘기도 날아와 우는
해질녘 뜨락에서 나 홀로! (P.58 )
소록도*에서
서럽게 살다 외롭게 죽은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왔다.
사람 축에도 짐승 축에도 끼지 못해
만신창이가 된 병든 몸을 이끌고
숨 막히는 전라도 황톳길을 걸어서
이곳까지 흘러온 天刑의 시인.
육지와 섬 사이의 바다가
배꼽 밑으로 흘러내린
청바지처럼 누워 있는 소록도.
성한 목숨이라곤 없는 유배의 땅에서
자살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사내가
남은 발가락 다 떨어질 때까지
찾아서 헤맨 꽃 청산.
바윗돌에 새겨진 시 한수를 읽으며
문득 '보리피리' 소리를 들었다. (P.48 )
* 소록도에는 천형의 시인 한하운(韓何雲)의 시비가 있다.
햇볕 모으기
이제부터 나는
햇볕을 사랑하기로 했네.
그 옛날, 만주에 있는 우리 집 토담 밑에서
아편쟁이 중국 노인이
때 묻은 저고리 풀어 헤치고
뼈만 남은 앙상한 가슴에
햇볕을 그러모으며 졸고 있었듯이.
그러기에 눈 어둡고
고개 휘는 시절 앞에 선 나도
볼품없이 여윈 몸뚱어리에
햇볕을 조금씩 모아 담기로 했네.
하늘에 매달린 용광로에서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생명의 불을
다소곳이 모아 간직하기 위해!
그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P.61 )
-민영 詩集,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할 곳이 있다>-에서
세월과 기품이 서린 순정하고 강인한 시여린 듯하면서도 강인한 시정신으로 지난 반세기 한국 시단을 오롯이 지켜온 ‘문단의 작은 거인’ 민영 시인이 올해 팔순을 맞아 아홉번째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를 펴냈다. 『방울새에게』(실천문학사 2007)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시인은 지나온 삶을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보고 아스라한 기억 속의 시간들을 회상하며 “자신에 대한 치열한 냉엄성과 이웃을 향한 무한한 애정이 겹치는, 냉엄과 온정이 공존하는”(김응교, 해설) 아늑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한평생 오로지 시의 외길을 걸어온 노시인의 묵직한 연륜과 단아한 기품이 서린 정갈한 시편들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언어와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에 실려 진실한 삶의 의미와 자연의 섭리를 일깨우는 잔잔한 울림을 선사한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꽃도 철 따라 피지 않으리라/그리고 구름도/嶺 넘어 오지는 않으리라//나 혼자 남으리라/남아서 깊은 산 산새처럼/노래를 부르리라/긴 밤을 새워 편지를 쓰리라(「序詩」 전문)
즐거움도 반가움도 소란스러움도 다들 자기 역할을 잘 끝내고
지금은 윤대녕의 소설처럼.. 정적이 필요한 시간.
정적에 기대어, 양말 벗은 발처럼 편안한 연휴의 아침.
돋보기로 검은 종이에 햇빛을 모아, 연기를 피어내는 그런 시간.
그리고 늙은 詩人의 詩集을 읽는 시간. 한하운의 '보리피리'를 듣는 시간.
약속했던 가을 은행나무를 떠올리며, 우리의 '약속의 시간'을 기다리는
고요하고 고즈넉한. 좋은 가을 아침,